저항 이후에 남은 질문
최근 데이비드 브룩스의 책을 읽다가 한 문장에서 오래 멈췄다.
평화주의를 받치는 것은 두 개의 기둥이다.
하나는 저항이고,
다른 하나는 악한 의지에 맞서는 선한 의지를 세우는 것이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지난 시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교회에서 나는 잊지 못할 두 번의 담임목사를 겪었다.
첫 번째 목사님 때 나는 꽤 직선적인 사람이었다. 설교나 교회의 결정에서 문제가 보이면 지적했고, 때로는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그것이 정직이라고 생각했다. 잘못된 것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이 더 비겁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말했고, 반대했고, 때로는 거칠게 저항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전하려던 문제의식은 사람들에게 저항이 아니라 부정성으로 전달되었다는 것을. 돌이켜 보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단순했고, 미숙했고, 거칠었다. 의도가 항상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옳다고 믿었던 말이 관계를 먼저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 경험 이후 두 번째 목사님을 만났을 때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이번에는 싸우지 않았다. 대신 조금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다른 일을 시작했다. 몇 사람과 함께 큐티 모임을 만들고, 개인적으로 성경을 더 공부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바꾸려 하기보다 그저 말씀을 함께 읽는 작은 공간을 만드는 일. 처음에는 이것이 무관심인지, 아니면 성숙인지 나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예전처럼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 교회를 오래 경험하다 보니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만든 교회는 결국 다 비슷한 것 아닐까. 어디를 가도 비슷한 문제들이 반복된다. 권력과 갈등, 상처와 실망. 이 생각에 도달하면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한다.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를 냉소적으로 바라보거나.
하지만 나는 아직 그 사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신앙 자체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완벽한 공동체를 찾기보다 작지만 건강한 공간을 만들어 보는 쪽을 선택했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문장을 다시 떠올린다. 세상은 저항으로도 바뀌지만, 선을 세우는 방식으로도 바뀐다.
예전의 나는 저항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의 나는 작은 것을 세워 보려는 사람이다. 어떤 방식이 더 옳은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이런 생각은 든다. 어쩌면 신앙은 완벽한 교회를 찾는 일이 아니라, 몇 사람이 진지하게 말씀을 읽고 서로의 삶을 나누는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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