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걷던 아빠
오름 정상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너나없이 인생사진을 남기느라 분주했다.
바다를 배경으로 누군가는 점프를 하고,
누군가는 가족을 불러 세우고,
누군가는 셀카봉을 뻗었다.
그 와중에 아빠는
잔디밭 한가운데로 조용히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등을 뒤로 기대고,
팔을 뒤에 짚은 채,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 자유롭고,
너무 순수해서
나는 순간 웃음이 났다.
기안84가 제주에 내려와
바람을 맞고 있는 장면 같았다.
나는 마음이 조금 급했다.
“아빠, 우리 사진 많이 찍자!
해 지기 전에 바다를 배경으로 꼭 남겨야 해요!”
아빠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잠깐 앉아 가도 된다.
쉬어 가도 된다.”
그 말에 나는 멈췄다.
아빠는 눈으로 바다를 보고 있었고,
가슴으로 저녁을 품고 있었다.
“아…진짜 행복하다.”
그 말이
그날의 햇살보다 더 따뜻하게 들렸다.
오름을 내려와 바닷길을 걷는데,
갑자기 신발이 끊어졌다.
쪼리 한 짝이 뚝, 하고 떨어졌다.
당황해서 멈춰 선 내게
아빠가 돌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업어줄까?”
나는 웃었지만,
눈물이 날 뻔했다.
나는 서른이 넘은 딸이었고,
아빠는 여전히 무뚝뚝한 사람이었는데
그 말 한마디가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기다려왔던 말 같았다.
“업어줄까?”
사실 나는
언제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어린 날, 감정을 숨긴 채 걸어가던 길에서도.
엄마 없이 병원에 간 날에도.
말없이 참았던 사춘기에도.
그 말이
무언가를 풀어줬다.
조용히, 부드럽게,
“괜찮아”보다 더 따뜻하게.
우리는 다시 오름 정상에 앉았다.
아빠는 바람을 가만히 맞으며 말했다.
“너무 삶에 얽매어 살 필요 없다.
과거는 과거대로 흘려보내고,
용서 못 할 일도 없고,
더 사랑해주지 못할 이유도 없어
늘 마음을 가볍게 하고 살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아빠, 진짜 바쁘다면서
어떻게 나랑 여행 왔어?”
아빠는 말했다.
“니 후회할까 봐 왔다.
시간 지나서,
그때 아빠랑 여행 갔어야 됐는데
그런 마음 니가 가질까 봐서.”
그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우리는,
말보다 먼저 마음으로 걸었다.
나는 걷기만 해도 벅찬 그 길 위에서
아빠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 모습은
내가 살아오며 가장 보고 싶었던 장면일지도 몰랐다.
그날, 나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따뜻하게 풀려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울지 않고 살아온 날들을
이렇게 사랑으로 덮을 수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