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거푸 다수의 손님이 지사를 다녀갔다. 눈 뜰 힘도 없을 만큼 에너지가 다했다.
1. 정부 고위 관료가 지사에 다녀갔다. 그것도 1박 2일 일정으로.
연초부터 온다 온다 말만 무성했지 진짜 오겠어 하시던 그 분이 진짜 온다. 장관급 보다는 살짝 낮지만, 차관급 이상은 되어 보이는 실세 중 실세. 밉보이면 여기뿐만 아니라 나머지 관계사업도 다 접어야 할 수도 있는 최고위 VIP.
일주일 전부터 비상이 걸렸다. 숙소, 음식, 유흥, 동선, 선물, 사진 촬영 장소, 브리핑, 현장 안내 등 뭐 하나라도 실수가 있으면 안 되었다. 사전 리허설도 다 하고 영어 프레젠테이션 발표시간은 물론 단어 하나까지 다 점검하고 만반의 준비를 한다고 했다.
정부 관료가 오는 당일. 업무는 일단 내려놓고 오늘의 업무는 무조건 의전. 도착 30분 전부터 도착 장소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고, 드디어 정문에서 도착했다는 전갈이 온다. 환대가 이루어지는 주 건물에서 한참 나가 길에서 90도 인사를 하며 맞는데, 정부 고관 VIP는 아직 안 오고 관계자 분들만 먼저 도착. 첫 시작부터 커뮤니케이션 에러. 어쨌든 내 입장에선 관계자 분들도 VIP 맞으니 환담장으로 먼저 안내드리고 VIP 도착만 기다리고 있는데 다시 연락이 온다. 한 시간쯤 늦겠다고. ㅡ_ㅡ 미리 좀 알려주면 안 되나. 출발할 때 도착각 나오는 길인데.
이왕 늦은 거 환담장에 들어가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차 소리가 난다. 이번에는 정문에서 연락이 안 왔다. 두 번째 커뮤니케이션 에러. 집에 있다가 초인종 누를 때 나가는 격이 되어버렸다. 아, 내가 설계한 의전은 이게 아닌데. 시작부터 느낌이 안 좋다.
고관 VIP님은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쿨하다. 그다지 격식이나 권위를 따지지 않는 분처럼 보인다. 문제는 너무 프렌들리 하셔서 말씀이 너무 많고... 미국식 영어가 아닌 파키스탄식 영어를 빨리 하셔서 알아듣기가 너무 힘들다. 일단, 늦은 시간에 도착하셨으니 숙소로 안내드렸고 환복 후 다시 나오신다.
저녁은 한국식 비빔밥. 사이드 메뉴까지 상다리가 부러져라 차린다고 조리사분들이 고생깨나 했다. 파키스탄도 쌀은 즐겨먹는 나라이며, 비빔밥을 잘 아시는 분이라 아주 반겨주셨는데, 이제 막 나물을 밥에 올려 비비려고 하는 찰나... 블랙아웃. 정전이다. 세상에. 이건 시나리오에 없는 일인데.
현장에 연락을 취해보니 계통 문제로 이 일대가 몽땅 정전. 이곳 숙소는 신축된 지 얼마 안 된 곳이라 심지어 비상발전기도 연결이 안 된 집이라 어쩔 도리가 없다.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한 채 식사 계속 진행. 내 잘못이 아닌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땀이 삐질삐질 나려고 한다. 갑자기 내린 비바람에 송전선로에 문제가 생긴 모양. 어쨌든 그렇게 암흑 속에서 대충 식사를 마치고 그날 일정은 끝났다. 그 이후에도 정전이 되었다가 복구되었다가 몇 차례 그랬는데, 다행히 밤 12시 정도에는 완전 복구가 되었다.
다음날 아침도 무사히 마쳤고, 현장으로 이동해서 기념사진도 찍고 설비 안내도 마쳤다. 지자체에 기념품을 전달하러 가려는 찰나에 VIP분의 한 마디. "짜이 먹고 갑시다." 아니, 이것도 시나리오에 없는데.
앞 동선 뒷 동선, 행사 참여자 등 모두의 동선이 분 단위로 맞춰져 있는데 갑자기 짜이를 찾으니 이를 우짜노. 급히 행사장 한편에 짜이를 준비시켰는데, 환담이 될만한 휴게공간이 아니라 다시 취소. 원 숙소로 이동해서 급하게 짜이를 짜 냈다. ㅠㅠ 하루에 서너 잔은 짜이를 마시는 이 나라 문화를 고려하지 못한 내 패착. VIP분이 짜이를 마시는 동안 행사장의 다른 참여자는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고, VIP를 맞는 준 VIP께 급하게 연락을 해서 짜이 환담장으로 모셔오는 동선 꼬이는 촌극이 발생.
뭐, 그래도 괜찮다. 모든 행사는 VIP 한 분만 기분 좋으면 성공인 셈. 그래서 행사 기획 시 VIP를 여러 사람 두면 안 된다. 다른 준 VIP도 많이 오셨지만 이분은 킹왕짱 VIP이시니 "그래서 그랬는데요"한 마디면 모두 수긍할 수 있는 분위기. 그래도 의전 챙기는 입장에선 사방팔방 눈치가 보인다.
큰 무리 없이 행사 잘 마치고 오찬까지 다 같이 드신 후 드디어 바이 바이.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90도 인사를 하고 나서야 휴우우우~ 한숨이 나온다. 한 건 마쳤다.
2. 보험사 조사관이 다녀갔다. 바로 이어서.
며칠 후. 지사에서 운영하는 설비의 보험 갱신을 위해 다국적기업 보험사의 조사관이 방문했다. 조직장 급 VIP는 아니지만, 설비 실사 이후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 따지게 된다면 보험 갱신 불허 또는 보험료 대폭 인상 등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므로, 회사 예산을 투입하여 받는 보험서비스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우월적 입장에 있는 VIP. 조사관은 말레이시아에서 오신 분이며, 이미 다른 유사 설비를 몇 군데 돌아보시고 오시는 길이라고 하셨다.
마찬가지로 VIP 대접에 준하는 제반 준비 및 환대. 첫날 도착하는 날 저녁 메뉴로 어디 내놔도 크게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한국식 불고기를 준비했는데... 아뿔싸... 오 마이 갓... 힌두교 신자이신 것. 힌두교 = 쇠고기 금지. 이슬람교 = 돼지고기 금지. 부랴부랴부랴 메뉴를 닭요리로 바꾼다고 조리사분들이 고생하셨다. "불고기 괜찮으시지요?" 미리 물어봤기에 망정이지, 안내없이 만찬을 시작했으면 시작부터 왕창 꼬일뻔 했다.
다행히 이 분도 매우 프렌들리하신 스타일. 감사하게도 억양도 미국식이다. 정부고관 VIP 모실때와는 긴장도가 다르다. 셀프디스 등 미국식 유머가 통한다. 문제는 너무 토크티브하셔서 내가 밥 먹을 타이밍을 못 찾겠다는 것... 어쨌든 첫날도 잘 마쳤고, 이튿날은 실사 점검이니 대부분의 업무는 현지 매니저한테 맡기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요다음에 말레이시아 올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라면서 웃으며 떠나셨다.
오늘의 미션도 클리어. 나는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또 방전되었다.
3. 채용 면접고사 면접관으로 투입
채용시즌도 아닌데 요즘 퇴사자가 잦다. 어쩔 수 없이 경력직 채용을 진행했다. 서류심사를 거쳐 다수의 지원자를 1차 선발 후 면접을 치러야 했다. 면접관으로 오랜 시간 붙들려있는 것도 무척 피곤한 일이다. 다수의 면접자에게 공정한 질문을 던져야 하며, 파키스탄 억양이 강한 그들의 영어를 귀 쫑긋 세우고 듣고 해석해야 하는데 솔직히 무슨 말인지 다는 모르겠다. 면접이 끝나면 그들의 경력과 구술내용을 종합해서 누가 봐도 객관적인 심사표를 만들어 제출해야 하는데 이것도 부담 백배. 내가 치르는 시험도 아닌데 면접관으로 다녀오면 또 녹초가 된다.
나는 지극히 내향적 성향의 사람이고 남 앞에서 말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아니, 말을 조금만 많이 하면 그날 쓸 에너지가 급격히 고갈되어 버린다. 뭐, 그렇다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라서, 상대적으로 글을 많이 남기는 편이다. 대화 보단 채팅이 편해서 사실 전화 쓸 일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손님 맞는 일은 그렇게 못 한다. 어쩔 수 있나. 회사일인데 먹고살아야지. 우리 회사 사장님의 일과는 점심 저녁 편한 시간이 없을 만큼 거의 1년 내내 손님들 만나는 일과던데, 정말 고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 지사는 상대적으로 도시에서 거리가 멀고 교통이 무척 불편한 곳에 있다. 이동하기엔 무척 불편하지만 나는 가끔 그 점이 되려 이 지사의 장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요번 주말에는 직원들 도시로 다 보내고 지사 안에서 혼자 도 닦으며 충전하고 있어야겠다. 조용히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