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하고 평온한 주말입니다. 파키스탄도 나름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오늘은 매우 포근하네요. 낮 기온이 20도가 넘어갑니다. 온풍기를 틀지 않아도 하나도 춥지 않네요. 온돌 문화가 전혀 없는 이 나라에서 제가 지내는 건물은 난방은 오로지 온풍기에 의지하는데 온풍기를 틀면 일단 시끄럽고, 엄청나게 건조해져서 어지간히 춥지 않고선 그냥 견디는 편인데 오늘은 포근하고 쾌적하니 무척 좋은 날입니다.
오늘은 라운지에서 느긋하게 책만 보며 지냈어요.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지사 사택의 라운지를 무척 좋아한답니다. 넓은 공간에 채광도 좋고, 창밖 풍경도 예뻐요. 한국의 예쁜 커피숍에 비할바는 못 되지만 충분히 마음이 평온해지면서도 갇혀 지내는 갑갑한 마음을 잊을 수 있는 곳이거든요.
서두가 길었습니다. 주말을 느긋하게 저와 함께했던 책은 @Gino박진호 작가님의 최신작, "이탈리아 골목길 드로잉 산책"입니다. @Gino박진호 작가님이 브런치에 올리던 이탈리아 그림 여행기가 2022 우수출판콘텐츠로 선정되었고 발간까지 연결되었어요. 초보 브런치 작가들이 누구나 꿈꾸는, 발간이라는 꿈을 이루신 직장인이시죠. @Gino박진호 작가님은 정말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되었어요. 하루하루 그림일기를 정말 꾸준히 올리시고 계신 @그린제이 작가님 댁에 방문했다가 단골 구독자로 서로 친해져서 연인이 닿았어요. 글 쓰는 작가는 많지만 글 쓰면서 그림까지 잘 그리는 작가는 많지 않은데 @Gino박진호 작가님의 정밀하면서도 날카롭지 않고 포근한 독특한 그림체는 제 마음을 쏙 사로잡았지요.
저는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비판적이며 분석적인 사고성향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림을 참 좋아합니다. 실력이 미천하여 잘 그리진 못하지만 찬찬히 그림 감상하는 게 좋아요. 사진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오묘한 감정을 그림에서는 느낄 수 있어요. 작가가 그린 선 하나 색감 하나 붓터치 하나하나가 감정이 실려있는 것 같거든요. 작가의 감정을 하나하나 공감하며 감상하면 어느덧 제가 작가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느낄 때도 있어요. 찰나의 순간을 담아낸 사진도 감동적인 것들이 많긴 하지만, 작가의 감정이 그대로 투영되는 일은 그림만 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무척 독특합니다. 전문 그림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관광지를 소개하는 전문 여행기도 아녜요. 시점도 일인칭 독백 시점에서 3인칭 관찰시점으로 왔다 갔다 하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어디까지가 감상에 젖은 상상인지 모르게 아주 부드럽고 매끈한 문체로 수필과 소설을 넘나드는 필력이 역시 출간작가는 다르구나 느끼게 해 줍니다.
선 그림 감상
후 독서
이 책이 어느 카테고리에 속하는 책일까 다 읽고 나서도 혼란해서 네이버를 찾아봤더니 "예술/대중문화/미술실기" 영역으로 분류되어 있네요. 역시, 제가 처음 그림에 끌려 작가님 브런치를 찾았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나 봅니다. 이 책이 작가님이 직접 그린 그림을 담고 있지 않았다면 읽는 재미가 절반으로 뚝 떨어졌을 것 같으니까 저 역시 이 분류체계가 맞다고 동의합니다. 다만, 그렇다고 그냥 "미술책"으로만 정의하기엔 필력이 너무 아깝다구요.
어쨌건, 전문 여행도서는 아니지만 이탈리아를 가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이탈리아를 엄청나게 가 보고 싶어질 거예요. 저도 그랬거든요. 해외에 살지만 딱히 해외여행에 별 관심이 없었던 저는, 작가님이 올린 이탈리아 이야기와 이탈리아 골목길 어반드로잉을 보고 마음을 홀딱 빼앗겨서 무작정 고고를 실행했던 사람 중 한 사람이거든요. 단언컨대, 작가님의 브런치 글이 평범한 사진과 글이었다면 저 역시 수많은 여행 블로그 중 하나 정도로 치부하고 별 관심을 두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50대 공돌 아저씨가 그린 그림이라고 하기엔 사기에 가깝게 너무 예쁘잖아요. 그러니까, 읽기 전에 마음을 홀라당 빼앗기지 않게 정신 단단히 차리고 책을 접하셔야 해요. 작가님이 책 중 언급한 것처럼 "사이렌의 노랫소리처럼" 독자들을 이탈리아로 불러들일테니까요.
저는 사실 작가님이 책을 출간하기 전에 브런치를 통해 일화의 상당분을 먼저 읽고, 그렇게 세뇌된 후,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구요, 그런 후 다시 이 책을 읽었어요. 오~~~ 신기한 경험이 또 펼쳐집니다. 예전에 분명히 스마트폰 브런치 어플로 읽었던 글인데, 읽은 기억은 나는데 느낌이 완전 다르지 뭐예요. "이탈리아"라는 배경지식이 하나도 없을 때 그냥 신기한 눈으로 막연히 상상하며 읽었을 때의 감상과 이탈리아를 다녀와서 나만의 기억창고를 가진 후의 독후 감상이 달라도 너무 달라요. 아~~ 이 말이 그 말이었구나. 아, 이게 그거였구나. 아, 내가 그 느낌 알지 알지 하면서 다시금 지난 여행을 복기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책을 넘기다가 반가운 그림이 보여서 사진을 찍어뒀어요. @Gino박진호 작가님의 브런치 프로필 사진으로 쓰이던 그림이 이거였구나~ 했거든요. 이탈리아에 가면 거리의 악사들이 무척 많아요. 감성을 건드리는 그들의 연주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슈퍼 짠돌이인 저는 단 한 번도 관람료? 청취료?를 낸 적 없었는데 글을 읽다 보니 기분 좋았던 느낌을 그렇게 표현하며 거리의 악사들과 한 번이라도 소통하는 게 먼 훗날의 나를 위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연주 정말 멋있었어요~ 잘 들었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즐겨주셔서 저도 너무나 기뻐요." 짧지만, 잊히지 않을 기억이 되는 거죠. 그리고 뭐든 작은거라도 빚지고 살면 불편해요.
작가님의 표현 중 완전 제 마음을 후벼판 명문장 몇 개만 꼽아봅니다. 혼자 배낭여행을 다녀온 감성이 완전히 메마르지 않아서 그런지 어쩜 이다지도 공감이 되는지요.
여행지의 날씨는 무조건 맑아야한다. 혼자서 여행을 할 때는 더욱 그렇다.
혼자 하는 여행은 오롯이 혼자만의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둘이 하는 여행은 자유를 둘로 나누어야 한다. 고로 자유로움은 고독과 맞닿아 있다.
혼자 하는 여행은 싸울 일 없어 평온하지만 또한 외롭습니다. 저는 성향상 혼자있길 좋아하는 극내향인인데 그렇다고 항상 혼자만 있기를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특히나 볼거리 즐길거리가 가득한 여행지에서는요. 아마도 작가님도 일 때문에 찾은 이탈리아에서 소박하게 혼자 다니신 곳이 많았던 것 같은데 비슷한 감정을 느끼셨을 겁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이런 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느낀 것들도 있어요. 아, 베네치아가 그냥 항구도시인줄만 알았는데 섬으로 더 유명한 곳이었군요. 베네치아 본섬도 연육교가 있어 버스로 갈 수 있던 거였네요. 지난 이탈리아 여행 때 베네치아를 못 들러보고 온 게 살짝 또 아쉽습니다. 관광객이 너무 많이 찾는 곳이라 관광세를 신설하고 방문객을 제한한다지만 오버투어리즘의 피해로 이제 예전만 한 정취를 느끼기 힘들다니 안 가는 게 맞나 싶다가도 다 망가지기 전에 늦기 전에 가야 하나 생각이 왔다 갔다 합니다. 그리고 자동차 이름 중 유독 이탈리아 지명이 많다는 건 일찌감치 잘 알고 있던 사항이었지만 "무라노"마저 베네치아의 작은 섬 이름이었다는 건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네요. 무라노는 닛산 대형 SUV 이름인데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에 당연히 일본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탈리아 섬 이름이었어요. 자동차 이름 중 이렇게 이탈리아 지명이 많은 건 그만큼 이탈리아 구석구석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정체성과 그 지명만의 독특한 이미지가 강렬해서 그런 걸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림이 주는 힘은 참 위대합니다. 브런치로 한 번, 종이책으로 두 번째 읽은 저는 이제 수시로 그림 먼저 감상하고 그림에 숨겨진 얘기가 생각이 안 날 때 다시 책을 꼼꼼히 읽을 것 같습니다. 음, 그럼 이 책의 정의는 "그림책" 맞네요. 그림의 해설이 기가 막히긴 하지만 그림의 힘이 더 강력해요. 그리고 저는 이미 다수의 이탈리아 도시를 여행하고 왔지만 짧은 시간에 다 보지 못한 도시의 정취를 이 책을 통해 달래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그런데 어쩐대요. 이 책을 읽다 보니 또 이탈리아에 가고 싶어지는걸요...
뽀너스.
작가님의 펜화 실력이 너무나 부러워서 책을 읽다말고 저도 즉석 펜화에 도전해봤습니다. 처음 그려본 것 치고는 나쁘지 않지요? 제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또 비슷하겐 한대니깐요. (ㅡㅡ)V
갤럭시 노트 PENUP으로 한땀 한땀 그려봤습니다
요게 원본 이미지. 햇살 쬐며 느긋하게 책 읽는 평온한 주말은 "이보다 좋을 수 없다"죠. 아임 해피해피 쏘 해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