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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Jun 13. 2023

와가보더 국기하강식 관람기

국가 간 자존심을 건 진지한 댄스배틀

 현지 엔지니어링 회사와 용역 중간결과에 대한 회의를 마쳤다. 민감한 문제를 영어로 얘기하려다 보니 또 버벅버벅 했지만 괜찮아... 내가 발주자니까 지들이 알아들어야지. 말하는 나도 갑갑하다구우.... 이놈의 영어 울렁증은 과연 치유될 날이 오긴 올래나.



 만족한 결론은 못 내렸지만, 어쨌든 발주회사의 조직장(=나)이 직접 와서 회의주재를 한 덕에 곁가지 논쟁은 일단락이 되고 생각보단 빨리 회의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실무는 이제 다 했고, 오늘 오후부터 내일까진 본격적인 문화 탐방시간.


 해 질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라호르에서 가장 유명한 구경거리 중 하나, 와가보더 국기하강식에 가기로 했다.

 부지런히 이동해야 겨우 시간을 맞출 수 있겠다. 국기하강식은 17:30 시작인데, 최소 30분 전에는 입장이 마감된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독립 되던 당시 영국이 임의로 그어 준 국경선 문제로 당연히 국경선이 그어지던 지역 인근에선 분쟁이 끊이질 않았는데 라호르 인근 지역인 와가(Wagah)에선 국경선 분쟁이 상대적으로 덜 했고, 양 측에서 협조적인 관계가 구축되어 국경선 정리가 조기에 순조롭게 잘 되었다. 그런 까닭에 적대적 국경선을 가지게 된 다른 지역보다는 와가를 통한 국경출입로가 활성화되었고 양 국을 상징하는 국기하강식도 이곳에서 이루어지게 된 거라고 한다.


 와가(Wagah)는 라호르 중심지에서 차로 30여분, 20km 떨어진 거리의 마을 이름이고, 보더(Border)는 국경선을 말한다. 와가보더(Wagah border)는 파키스탄 쪽에서 부르는 명칭이며, 인도쪽에선 아타리보더(Attari Border)로 불리긴 하지만, 와가보더(Wagah border) 또는 와가-아타리-보더(Wagah-Attari border)로 불리는 쪽이 더 많다. 파키스탄 보단 인도 쪽 인구가 훨씬 더 많은데 지명 선점을 초기에 잘해서 그런 건지 다른 연유가 있는 건지 어쨌든 와가보더 명칭이 더 잘 알려져 있다.

 


 와가보더 행사장 입구. 곳곳에 도배되어 있는 SK ZIC 엔진오일 광고가 눈에 팍 들어온다. 파키스탄 국경지대에 왜 이리 SK ZIC 광고만 많을까 의아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외국에 나와 있으면 한국 상품, 한국 광고만 봐도 반갑고 자부심이 올라온다.



 초대형 파키스탄 국기대 및 국기. 올려다보는 것만 해도 고개가 아플 지경.



 역시 국경지대라 곳곳마다 초병이 깔려있다.


 국기하강식 행사장으로 들어가 봅시다.


 군인들이 짐 검사를 한다. 큰 가방은 들고 들어갈 수 없다.



 철문을 마주 보고 양 국의 국기가 중립지대에 게양되어 있다. 행사가 시작하면 철문이 열린다.





 인도 측 행사장은 2단에 관람객이 꽉 찼는데, 상대적으로 파키스탄 관람대는 1단에 그나마도 관객이 별로 없다. 나는 오늘 파키스탄 편인데 어쩔 수 없는 국력의 차이가 여기서도 느껴진다.


 외국인이라고 특별히 국경선과 가장 가까운 좌석으로 안내해 주긴 하는데, 그늘이 없어 너무 뜨거웠다. 사실 라호르의 연중 평균기온은 6월이 가장 높은데 사진에서 보다시피 이 날은 구름 한 점 없이 햇살이 뜨거운 날이었다. 체감기온 40도는 훌쩍 넘는 날씨였다. 그늘막도 없는 저 상태로 한 시간을 앉아있었더니 결국 목덜미가 햇살에 벌겋게 익어 피부에 물집이 잡히는 화상을 입었다. ㅠㅠ 6월에 파키스탄을 방문하신다면 반드시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다니실 것을 강하게 권한다.


 날씨가 타는 듯이 더우니, 시원한 청량음료를 파는 행상이 돌아다닌다. 파키스탄 국기를 파는 사람도 있다. 피부색 뽀얀 외국인이 파키스탄 국기를 흔들어주면 당연히 좋아하겠지. 300루피를 주고 국기 하나를 샀다. 다음에 한국에 입국하면 행사용 태극기도 넉넉하게 사 와야겠다.



 우리나라 장구와 매우 비슷하게 생긴 악기로 행사 시작을 알린다.



 식전에 기수단들이 파키스탄 깃발을 흔들며 흥을 돋운다. 저 청년은 외발 호두까기 인형마냥 정말 외발청년인데, 한쪽발에 의지해서 스핀댄스를 열정적으로 춘다. 이목을 끌기엔 부족함이 없지만 어쩌다 한쪽 발을 잃어버렸을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파키스탄 국기하강식 진행을 하는 의장대. 식전 기꺼이 응원객들을 위해 포토타임을 열어준다. 의복이 무척 화려하다. 동작도 큼직큼직한데 머리에 긴 깃대까지 꽂아놓으니 커다란 공작새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키가 절대 작은 편이 아닌데, 이들 앞에서 서니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며, 군인들에게서 위압감마저 느껴진다. 국가적 자존심을 걸고 전국에서 키 되고 몸매 되는 사람들로 뽑고 뽑아 왔으리라. 의장대 군인들은 대충 190cm 전후되어 보였다.



 이게 오늘의 진짜 하이라이트.


 나는 미국식 또는 한국식 의장 사열(총 돌리기 묘기 등 칼같이 각 잡힌 절도 있는 행동) 정도의 이벤트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그런 거 없다. 속도감 있는 행진과 더불어 머리까지 올라오는 과장된 손동작에 과장된 발차기가 전부다.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한데 다들 너무 진지하니까 다른 나라 의장대에선 느끼지 못했던 신선한 느낌은 있다.

 인도 군인과 파키스탄 군인은 복장의 색상만 다르지 화려한 머리장식부터 동작까지 맞춘 듯 똑같다. 다만, 내 눈에는 빨강과 검정의 강렬한 조화에서 오는 힘이 느껴져서 파키스탄 쪽 디자인이 더 멋있어 보인다.

 국경 철문을 경계로 해서 양 국 군인의 발걸음도 행동도 거울에 비친 것처럼 똑같다. 같은 음악 같은 리듬을 사전에 공유하고 보폭 동작 하나까지 사전에 기획해서 연습했음에 틀림없다.


 사회자(인지 녹음 재생인지 모르겠지만)는 함성으로 박수를 유도하며 행사 중간중간 자주 "파키스탄"과 "진다바드(Zindabad, 만세, 영원하라 라는 뜻)"를 선창한다. 나를 포함한 관중 역시 신호에 맞추어 "파키스탄"과 "진다바드"를 목이 터져라 외친다. 그러다보면 신기하게 (나는 파키스탄 국민도 아닌데) 애국심 비슷한 뜨거운 감정이 속에서 올라온다. 나부끼는 깃발, 다 같이 외치는 슬로건은 세계 어디에서나 통하는 조직의 구심점을 만드는 간단하고도 확실한 방법이다.



 트럼펫 소리에 맞춰 양 국의 국기가 동일한 속도로 내려온다. 줄을 풀고 던지는 시간과 각도까지 양 국가가 똑같이 맞추는 광경이 나름 볼만하다.



 국기하강식은 대충 30여 분이 걸린다. 하강식이 끝나고 행사장 한쪽에 작게 마련된 박물관을 보고, 주변 공원을 살짝 둘러보다 다시 왔던 길로 돌아왔다. 박물관에는 역사적 사진, 각 지역별 전통의복 등이 전시되어 있던데 공간도 좁고 크게 특색 있는 소개는 아니어서 딱 10분 관람이면 충분했다.



 와가보더 국기하강식을 보는 내내 나는 우리나라 판문점 생각이 났다.


 아마,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판문점을 떠올릴 것이다.

 마치 서로 간 댄스배틀을 하는 듯한 와가보더 국기하강식을 보고 있노라면 양 국이 적국인지 형제국가인지 전혀 구분이 안 되고 그저 사이좋은 이웃처럼 보인다. 사이가 나쁘다면 저렇게 합이 착착 들어맞는 댄스배틀을 기획할 수가 없을 거니까.


 하지만, 인도와 파키스탄은 서로 적개심이 대단한 나라이다. 인도가 핵개발을 할 때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핵을 가져야 한다며 세계 경제봉쇄조치를 당하고도 끝끝내 핵을 개발하여 보유한 나라가 파키스탄이다. 인도-파키스탄은 역사적으로 무수히 많은 무력분쟁을 겪었고 몇 년 되지 않은 2019년에도 인도의 파키스탄 공습에 반발하여 인도 전투기 2기를 격추시키는, 전쟁 직전까지 가는 분쟁 사태가 있었다.


https://namu.wiki/w/2019%EB%85%84%20%EC%9D%B8%EB%8F%84-%ED%8C%8C%ED%82%A4%EC%8A%A4%ED%83%84%20%EB%B6%84%EC%9F%81


 그런데, 그건 그거고 이곳 와가보더에선 양 국가 간 적개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국기하강식은 양 국가의 친선교류 및 축제의 장처럼 느껴질 뿐이다.


 파키스탄이나 인도나, 어차피 종교만 다를 뿐, 문화적 민족적 뿌리는 다 같은데 왜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안타깝다. 하여간 영국이 식민지배하다 떠난 곳은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남겨놓고 원주민들끼리 분열하게 만들어놨다. 영국이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 역시 식민지배 역사가 없었다면 남한 북한 구분 없이 단일민족으로 지금보다 훨씬 강성한 나라가 되어 있지도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에효. 독립을 해서 다행이긴 한데, 쪼개지 말고 처음부터 한 나라로 인정해 줬으면 정말 좋지 않았을까...


 국가끼리 처한 상황도 스토리도 비슷한데, 판문점에서도 이런 국기하강식을 기획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우리나라 국군 의장대의 실력은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편이니까, 의장대 공연 후 약속된 하기 퍼포먼스를 하면 딱 보기 좋지 않을까 싶다. 관광상품으로 만들어서 외국인들에게 소개도 하고, 그 이면에 분단의 아픔과 판문점의 역사 이야기도 끼워 팔다 보면 언젠간 남북이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고 통일에 조금 더 유리해지지 않을까. 나 어릴 때 김일성이 죽고 21세기만 되면 곧 통일이 될 거라고 배워왔는데, 21세기 하고도 22년이 더 흘렀구만 통일은 그때보다 더 요원해 보이며 양 국가 간 이질감은 더욱 커진 것 같다.


 와가보더 국기하강식은 인도 쪽에서도 접할 수 있는 관계로, 한국에도 꽤나 알려져 있는 관광상품이긴 한데, 유명하다고 안심해선 안 된다. 2014년 11월 2일, 이곳 와가보더에서 자살폭탄테러가 발생해서 무려 60여 명이 사망하고 110명 이상이 다치는 참사가 일어났다. 파키스탄에서 테러는 상대적으로 서쪽 국경지대에서 더 많이 발생하긴 하지만 안전한 지역이라고 정해진 곳은 없는 것 같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411030952058887



 도심지로 향하는 라호르 길은 혼돈 그 자체였다.


 차, 오토바이, 사람이 한데 엉켜 마치 좀비영화에서 탈출하는 인파 무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노련한 우리 기사님은 사고 한 번 안 내고 우릴 안전하게 다음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셨다.


 인샬라. 오늘도 안전하게. 오늘도 무사하게.


(다음 얘기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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