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도 따지고 들면 수십 종
내가 살고 있는 파키스탄은 지역 방언이 많은 정도를 넘어 아예 다른 언어로 분류되는 수준의 언어가 70~80여 종이나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측컨대 방대한 땅덩어리가 한 국가로 통합되지 못하고 각자 발전하던 기간이 길고 길어져 같은 가닥의 언어가 세부적으로 자체 진화한 결과물이지 않을까 싶다.[대부분 비슷한 어족으로 문법이 비슷해서 단어만 공부하면 상당수의 언어가 별 무리없이 상호소통이 가능하다고 한다.]
비슷하게, 우리나라도 과거에 통일되지 않았다면 신라어, 고구려어, 백제어, 발해어, 가야어, 탐라어 등으로 나뉘어 비슷한 문법은 유지한 채, 각 국가별 단어를 별도로 배워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한국인. 경상남도 소도시 출신. 지방 소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까닭에 이 지방언어[경상도 사투리]에 대해 잘 안다. 표준 한국어는 있지만, 지방에는 표준 한국어를 쓰지 않는다. 뭐 그리 큰 나라도 아닌데 이는 참 신기한 일이다. 도 경계만 넘어가도 즐겨쓰는 단어나 말의 억양이 확연히 달라진다. 그나마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지역 간 언어의 편차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과정은 원활한 의사소통과 지역감정 완화를 위해서는 긍정적인 흐름 같다.
언젠가 미국의 네이버지식인 쯤 되는 Quora 사이트에서 "한국의 언어는 몇 종인가요?" 질문을 봤는데, 답변이 "한국에는 한국어를 씁니다. 좀 더 세분화하면 본토에선 표준 한국어, 제주에선 제주어를 씁니다."라는 참신한 답변을 봤고 공감하며 끄덕였다. 오랜 기간 떨어져 있던 물리적 한계로 제주도 방언은 육지어와 단어부터 다른 부분이 많아서 사전지식이 없다면 육지사람과 대화를 100% 이해하며 나누기 어렵지 싶다.
그럼, 경상도어는 어떤가. 분석하는 대상이 여전히 너무 넓은 것 같긴 하지만, 언어학자 시선이 아닌 경상도를 고향으로 두고 타지에서 살고 있는 내 시선에서 한 번 정리해 보자.
- 경상도 사람도 맞춤법은 구분하지만, 발음도 구별해서 못 하고 당연히 들어도 뭐가 다른지 모른다.
- 추워라, 더워라 발음이 [추ㅸㅓ라] [더ㅸㅓ라]가 되는데, [추버라] [더버라] 발음이 아니다. 입술이 아주 살짝 붙었다가 떨어지면서 v에 가까운 발음이 나는데, 그렇다고 아랫입술을 깨무는 v발음도 아니고 ㅂ발음을 아주 살짝 하는 발음이다. 고대 한국어에 있던 발음인데 현대로 오며 소멸된 발음으로, 경상도 사투리에 그 흔적이 남아있는 한국어 발음.
- "질투는 나의 힘". 경상도에선 십중팔구 [질투는 나에 힘]이라고 읽힌다.
- "의사[으사]", "의족[으족]", "의금부[으금부]" 등 "의"자의 발음이 잘 안 된다.
- "어"와 "으"는 중간 발음으로 뭉개버리며 발음하며, 이 까닭에 "어"와 "으" 맞춤법 구분에 쥐약인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건 다 그런 건 아니고 같은 지역에 살면서 이거 구별을 잘하는 사람층도 또 많다. 1번에서 예를 든 "에"와 "애" 발음구분과는 상당히 다른 현상이다.
- 혜란이[해라~이], 미선이[미서~이], 계란 한 판이[개란 한 파~이]
- 경상도 출신이라고 하면 "'쌀'해봐, '쌀'"하고 놀리는 분들이 가끔 있는데 대부분 쌍시옷 발음 찰지게 잘한다(욕도 잘한다). 대구권 중에서도 일부 지역출신만 쌍시옷 발음에 취약하다.
- 영어에도 인토네이션이 있어 이를 지키지 않으면 대화하기 어렵다. 서울어도 특유의 억양이 있지만 그 억양을 지키지 않는다고 대화가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같은 한국어인데도 경상도어는 중국어의 성조에 가까울 정도의 확실한 성조가 있어 특정 단어는 이를 지키지 않으면 대화 자체가 안 된다.
- 유명한 예시
가. 가가 가가가?[↗️가↘️가 가가↗️가?] : 그 아이가 성이 가씨니?
가. 가가 가가가[↗️가↘️가 ↗️가~가↘️가] : 그 아이가 가져가서-
나. 가가 가가?[↗️가↘️가 ↗️가↗️가?] : 그 아이가 걔니?
️오로지 발음은 "가" 밖에 없지만 성조를 지켜 발음하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전혀 소통되지 않는다.
- 다른 예시
2^e, e^2 이의 이승, 이의 이승[↘️이의 ↗️이승, ↗️이의 ↘️이승]
경상도 사람끼리는 이거 받아쓰기도 가능하다.
- 말끝이 내려가서 어투가 퉁명스럽게 들리며 서울 사람들이 들으면 "너네 왜 싸워?" 할 때가 있다.
- (고)김영삼 대통령 때문에 유명해진 "경제[갱제]"
- 유사한 다른 예 : 형님[행님], 별로[밸로]
- 대구권에만 있는 니캉내캉 - 부산이나 경남권에선 거의 안 쓰는 말이다.
대구권은 "니 와카는데?[너 왜 그러니?]" 해도 부산&경남권은 "니 와 그라는데?"가 더 선호된다.(서로 알아듣긴 한다.)
- 어거 언제 하는교? 밥은 뭇는교? : 경상도어로 들리긴 하는데 서부경남 권역에선 "~는교?"는 잘 쓰지 않는다.
- 우얏든, 우쨌든, 어쨌든, 워쨌든 : 경상도 세부 출신별로 선호하는 발음이 다 다르다.
- 암튼 경상도 사람끼린 조금만 대화해 보면 같은 경상도어를 써도 세부적으로 경상도 어느 지역말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맞힐 수 있다.
대충 생각나는 대로 적어봤는데, 나는 언어학자가 아닌 관계로 정확하게 표현한 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같은 경상도지만 "내가 사는 곳에선 안 저러는데?" 하실 수도 있다. 같은 경상도라도 지역마다, 가문마다 고유의 단어와 어조가 조금조금씩 다 다르다. 그리고, 문장 속의 성조와 음운 속의 높낮이는 언어학 상 정확히는 다른 개념이긴 하지만 본문에서 따로 구분하진 않았다.
확실히 젊은 층으로 올수록 사투리의 강도는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 같다. 나만 해도, 내 부모님 세대보다는 확연하게 사투리를 덜 쓰는 편이다. 오랜 기간 타향살이 하다 보면 심한 사투리 억양은 대화 소통에 방해가 되며, 내가 지방 출신인 것을 그렇게 자랑스러워하지도 않았으며 그래서 사투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도 않았던 까닭이다. 발달하는 통신매체와 교통의 영향으로 과거보다 훨씬 더 단일 언어권을 형성하며 생활하는 환경 탓도 클 것이다.
방송매체에서 아무리 "표준 한국어"가 들려도 결국은 "부모의 말과 억양"을 따라 배우며, 평생 고쳐지지 않는다는 게 참 신기하다. 한국은 국토면적만 생각하면 그다지 넓은 곳도 아닌데, 이렇게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사투리가 현대까지 남아있다는 사실도 신기하다. 미래에 통신과 교통이 더욱 발전하고 사람들 간 왕래가 더욱 잦아지게 된다면 결국 모든 사투리도 소멸해 버리게 될까? 글쎄. 교통이 아무리 발달해도 당장 그럴 것 같지는 않고,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니 지방 고유문화가 소멸해 버리는 것 같아 좀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대구어, 부산어를 "고대 한국어 음성박물관"에 가서 헤드셋으로만 들을 수 있는 시대를 상상하면 어째 좀 삭막한 느낌이 든다.
서울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투리도 배우고 "서울말"도 배워야하는 지방 사람들이 좀 더 손해 같긴 한데, 내 경험을 비추어보면 그게 힘들었던 기억은 별로 없으니 뭐, 그건 그거대로 어쩌면 축복이자 장점일 수도 있겠다. 적어도 서울사람이 경상도말 배우는 것보단, 경상도 사람이 서울말 배우는 게(발성은 포기해도 듣고 이해라도) 훨씬 쉬운 환경이니까.
경상도 말에 관심 있고 나 쫌 한다는 사람은 아래 사이트에서 한 번 재미삼아 테스트해 보시길.
https://ddooddoo.com/ko/games/accent/
https://ddooddoo.com/ko/games/accent2/
세상에. 심지어 듣기평가도 나왔다.
https://ddooddoo.com/ko/games/accentl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