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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May 19. 2022

내국인? 외국인? 반국인.

내 자리는 어디인가? 중간 귀국 시 느꼈던 감정들.

 회사에서 운영하는 해외지사 중 격오지에 해당하는 곳에 근무하는 보상 중 하나로, 단신 부임자에 한하여 연간 세 번의 중간 귀국 휴가를 회사에서 지원한다. 2022년 5월은 나의 첫 중간 귀국 휴가.


 느낌은 꼭 군대에서 100일 휴가 나가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 지사는 주중에 외출이 불가하며(나갈 곳도 없거니와, 나가려면 경호계획을 세워서 요란하게 움직인다.) 군대 내무반처럼 사업장 안에 있는 사택에서 먹고 자고를 다 하니까, 말이 회사지 그냥 군대하고 똑같다.


 바쁜 일은 잠시 미뤄두고(진짜진짜 바쁘고 급한 건은 스마트폰으로 24시간 연결. 어쩔 수 없는 회사 사축), 본사의 허가를 득해서 잠깐의 중간 귀국을 했다.


 화려하고 깨끗한 인천공항. Q-code만 제시하면 QR코드 스캔 한 방으로 끝나는 신속한 방역 수속. 놀랍도록 깨끗한 지하철. 미래도시에 온 듯한 고속버스 터미널.


이곳이 정녕 한국이란 말인가? 세계 최고의 고속버스터미널.

 우와. 이게 내가 알던 한국이었나? 파키스탄에서 그간 너무 지저분하고 안타까운 모습들을 많이 봐 와서, 원래 그런 줄 알고 있었으면서도 적응이 잘 안 된다. 정말 우리나라처럼 사회 전체의 시스템이 급격하게 선진화된 나라가 전 세계 어디에 또 있을까 싶다.


 인천공항에서 저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집까지 겨우 도착했다. 홈 스위트 홈. 집이 최고지. 그런데... 집이 예전처럼 아늑하고 안락한 느낌이 아니다. 그냥... 마치 잠시 호스텔에 방문한 듯한 기분? 도착하자마자 도로 출국짐을 싸놔야 할 것 같은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듯한 기분? 어차피 아주 잠깐 있다 도로 갈 거라... 노곤하게 늘어질 마음의 여유가 없는 거다.


 말이 휴가지, 조직장 신분이니 회사에 귀국보고를 하러 갔다. 수시로 본사에 경영보고를 하기는 하지만, 대면보고만큼 확실한 정보전달 방법이 있겠는가. 그리고 잊히지 않으려면 여전히 대면 인사는 필수다. 예전에 몸담았던 친정 부서와 업무 관련부서를 층층이 돌아다니는데, 본사에서도 여전히 어딜 가나 손님 신분이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본사를 집처럼 살았는데, 이제 내 자리 하나가 없고 승진을 해 버리니 직원들도 내가 주변에 서성대는 걸 무척 불편해하는 것 같다.(가장 좋은 강의는 휴강이며, 가장 좋은 상사는 출장 간 상사라나....) 집에서도 이방인인데 여기서도 이방인이다. 사실 내 자리는 해외 지사장이고 자리뿐만 아니라 전용 사무실까지 있는 몸이니, 본사 부러울 게 없는데 그냥 느끼는 감정이 그렇다.


 한국은 참 좋다. 깨끗하고 편리하고 안전하다. 깨끗한 수돗물이 예전에는 당연했는데, 이게 너무나 놀라워 보인다. 꼭지만 틀면 미네랄워터 수준의 깨끗한 물이 쏟아진다. 물이 말라도 석회가 안 낀다. 거리 어디를 둘러봐도 주변에 쓰레기 하나 없고 거지도 강도도 없다. 해가 지고 밖에 나가도 무섭지가 않다. 밤이 되면 야경도 너무나 예쁘다. 정전되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날마다 감탄의 연속이다. 문제는 스스로 자각컨대, 이게 한국인으로 느끼는 감탄의 수준이 아니라는 거다. 그렇다고 외국인도 아닌데?


 인류는 평등하다고 배웠는데, 왜 이리도 불공평한가. 한국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안전하고 풍족하게 사는데, 파키스탄은 왜 이다지도 열악한가. 여기 파키스탄에서 태어난 어린 아이들은 무슨 죄가 있나. 너무나 풍요로운 일상을 접할수록 파키스탄 사람들이 생각나서 죄책감까지 느껴진다.


 앗. 내가 왜? 나는 한국인인데. 작년 말까지는 이런 감정이 0.01도 없었는데.

 스스로 다시 생각해본다. 나는 내국인인가? 외국인인가? 고작 몇 달 밖에서 살았다고 벌써 파키스탄에 꽤나 정신세계가 많이 공유되어 있나 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일하는 파키스탄이 정말 잘 살기를 바라며 내 필명처럼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지길 바란다.


 스스로 판단하건대 이제는 100% 순수한 한국인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파키스탄인도 아니고, 순도 50% 반국인이 된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이슬라마바드 행 비행기 바퀴가 무사히 공항에 닿았을 때, "이제 집에 왔구나."라고 되뇌이고, 재출근을 위해 지사 사택으로 돌아왔을 때 "홈 스위트 홈~, 그래, 집이 제일 좋지~"를 외치고 있었다. 여기가 진짜 내 자린가? 한국이 내 자린가?


 인류애 실현을 위해서 모두가 국가 이기주의는 좀 버리고,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면 좋을텐데. 왜 잘 사는 나라만 계속 잘 살고 못 사는 나라는 이 지경일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왜 싸울까. 다 큰 어른들이 말로 해도 될 텐데 싸우다 못해 왜 총칼을 들고 서로를 못 죽여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누가 좀 나서서 말려주면 좋으련만. 한국 가서 감상에 잠시 젖다가 결론은 횡설수설 세계 평화주의자가 되어버렸네. 이게 한쪽에 속하지 않은 반국인으로서의 진짜 마음인 것 같다. 암튼 전쟁은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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