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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Jun 11. 2022

라면을 빨리 끓이는 신박한 비법

내가 왜 이걸 여태 몰랐을까

 주말에 떵그러니 혼자 남겨지면 밥해먹기가 참 귀찮다.

 한국이라면 수많은 배달음식 중 적당히 시켜도 좋겠지만, 이곳은 파키스탄.


 나는 음식 불평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식사 예절이 매우 엄격한 가정에서 자란 탓에, 싫어하는 음식이 없는, 남이 해주는 음식이면 모든 것이 맛있는 절대미각을 소유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특유의 향신료 향이 강한 파키스탄 고유 음식을 매 번 찾아먹을 만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혼자 밥해먹는 건 한국에서도 귀찮은 법. 여기서 밥 해 먹는 건 조금 더 난이도가 높다. 먼저, 쌀을 구해야 하는데, 서남아시아의 주 쌀 품종은 안남미 품종으로 길쭉길쭉하고 찰기가 없다. 쌀맛이 나긴 하는데 구수한 풍미가 느껴지고 쫀득한 한국 쌀의 그런 맛이 안 난다. 그래서 이곳 한인들이 주로 사 먹는 쌀은 그나마 식미가 비슷한 중국쌀. 중국 마켓에 가야 살 수 있고, 일반 마트에선 구하기도 힘들다. 어쨌든 그 쌀로 1인분만 식사 준비를 하는 것도 생각보다 손이 가고 귀찮은 관계로, 가끔 밥을 왕창 해 두었다가 소분해서 냉동하고 그걸 전자레인지에 데워먹는 편이며, 요즘엔 그마저도 귀찮아 아껴둔 햇반을 하나씩 축내는 중이다. 밥이 지겨울 땐 한국에서 공수해 온 라면 끓여먹기. 이곳에서도 라면을 살 수는 있지만, 현지 라면은 입에 안 맞다. 자국 라면보단 수입산 인도네시아 라면이 조금 더 맛있긴 한데, 한국 라면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요다음에 하나하나 다시 끓여먹여보고 리뷰해보겠다. 한국 라면도 파는 곳이 있다고 듣긴 했는데, 라면 한 봉지에 3~4천 원가량 한다고 한다. 현지 레스토랑 인기 메뉴만큼 비싸다.


 몇 개 안 남았지만 유통기한도 얼마 안 남았으니 오늘 저녁은 한국에서 공수한 라면으로 결정. 다 먹고 하나도 안 남으면 뭔가 매우 처량할 것 같기는 한데, 상해서 버리느니 있을 때 먹자.(라면은 생각보다 유통기한이 짧다.)


 오늘 내가 쓰고자 하는 내용은 "라면을 빨리 끓이는 신박한 비법"이다.

 비법은 간단하다. 냄비에 물을 맞추어 올리고, 물이 끓기 전에 면발을 바로 넣기. 너무 허탈한가? 그래도 비법 맞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라면 면발은 "물이 끓고 나서" 넣는 거라고 배웠다. 라면 봉지에 그렇게 적혀있었으며, 어머니도 아버지도 누나도 학교 친구도 직장 동료도 누구든 다 이렇게 라면을 끓여서 그 방법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끓이면 맛있다!


 내가 오늘 주목하는 건 "빨리 끓이기"이다.


 라면 끓이는 방법은 "끓는 물에 3분"등으로 끓이는 시간을 정확히 명기하는데, 한국인이면 누구나 알다시피, 너무 짧게 끓이면 면발이 딱딱하고, 너무 오래 끓이면 면발이 흐물흐물 다 퍼져서 맛이 없다. 딱 그 3분(일부 우동류는 5분)이 면발이 적당히 꼬들 탱탱한 마법의 시간인 거다.


 스스로 요리를 조금씩 해 가면서 언젠가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미역국도, 된장국도, 재료를 끓기 전에 다 넣어서 보글보글 끓이는데, 왜 라면만 꼭 "끓고 난 후" 넣어야 하지? 무슨 이유로???

 라면 면발을 끓기 전에 넣으면 안 되나? 왜 안 되나? 내가 해봤는데, 세상에, "된다". 진짜다.


 식품제조사에서 "끓는 물에 3분" 표현을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환경, 어떤 자리에서든 같은 맛을 내게 하는 매뉴얼이 필요한데, 당신 같으면 "라면과 상온(25도씨)의 물을 냄비에 같이 넣어서 분당 30도씨씩 상승하는 화력으로 팔팔 끓은 후 1분(단, 화력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이라고 시간을 안내하겠는가. 아니면 "끓는 물에 3분"이라고 하겠는가. 라면 면발이 퍼지는 준거점을 전 세계 공통으로 잡으려면 "끓는 물" 기준으로 하는 것이 가장 간단하기 때문일 뿐이다. 물이 일단 끓기 시작하면 화력에 상관없이 100도만 유지하니까, 물을 끓이는 화력을 설명할 필요도 없다. 라면 면발을 처음 투척하는 온도가 몇 도인지 알 필요도 없다. 끓으면 100도 맞잖아.(물론, 표준대기압에서)


 대신, 라면 면발을 물이 끓기 전에 투척하면, 시간 관리에 신중해야 한다. 이게 끓고 난 후 1분이 적절할지 1분 30초가 적절할지 명확하지 않다. 끓기 전 처음 물의 온도도 다르고, 물이 끓기까지 시간도 다르고 화력도 다르고 모든 조건이 다 다르니까, 요리하는 사람이 라면을 적절히 휘휘 저어보며 아, 이 느낌! 할 때 불을 끄면 된다.


 내가 여러 차례 해 봤는데, 불 끄는 시간만 잘 조절하면, 물이 끓고 난 후 면발을 투입한 맛이랑 차이가 하나도 없다. 내가 보장한다. 그리고 확실히, 정말 확실하게 라면 준비부터 라면이 다 끓는 시간이 확연하게 짧아진다.(물론, 그 차이는 딱 상온의 물이 끓는 물이 될 때까지의 1~2분의 시간일 뿐이다.)


 매뉴얼은 중요하다. 하지만, 매뉴얼이 무슨 배경으로 작성되었고, 내가 처한 상황에서 그 매뉴얼이 유효한 건지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는 의심과 검증도 중요하다. 배는 고픈데, 물이 왜 빨리 안 끓나 기다리기 힘든 사람들은 이제부턴 그냥 라면은 상온부터 끓이자. 괜찮다. 진짜 맛있다.





※ 끓이고 먹느라 바빠, 오늘은 사진을 못 찍었네요. "한국이 그리울 땐" 작품에 쓴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https://brunch.co.kr/@ragony/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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