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폐 영업 아님. 이상한 상상 금지.
나는 정확한 국경선이 정해져 있지 않은 "분쟁지역"에 살고 있는 해외 주재원이다.
지역이 지역인만큼 이곳은 당국의 사전 인가 없이는 출입 자체가 불가능하며 업무상 특수목적 이외에 관광 목적 방문은 처음부터 허용되지 않는 곳이므로 나 같은 외국인을 만나기가 매우 어려운 곳이다.
나처럼 허가를 받고 주거하는 외국인에게도 매우 엄격한 보안규정이 적용되는 곳으로, 숙소 바깥을 출입할 때에는 미리 경찰서에 연락해서 호송차량과 무장경찰을 동원한 상태에서 주간에만 외출이 허용된다. 이동 차편은 방탄차를 준비해야 하며 일반차량 이용 시에는 이동허가가 안 난다. 바깥출입 한 번 하려면 방탄차 + 방탄차 운전사 + 호송차 + 호송차 운전사 + 무장경찰 0명 요렇게 준비가 되어야 나갈 수가 있다(내가 장관급 VIP라서 이러는 게 아니고, 모든 외국인 근로자에게 적용되는 디폴트 규정이다). 암튼 그래서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집 문밖엘 나가질 않는다.
어지간한 생필품과 식자재는 배달이 되므로 먹고사는 건 크게 문제가 없다. 다만, 배달 서비스로는 해결 안 되는 문제가 있다. 바로 이발.
수염은 스스로 다듬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셀프 이발은 좀 더 높은 차원의 문제다. 이발기계를 사서 셀프 이발의 경지에 오른 주재원도 과거에 있었다지만 나는 감히 시도를 못 해 보겠다.
지금까지 이발은 대도시 출장 갈 일이 있으면 잠시 짬을 쪼개서 미용실 들러 해결하고 왔었다. 그런데 이번엔 마땅히 타이밍이 안 맞네. 그 새 머리는 점점 길어 산발이 되어가고 있어 이번 주말엔 주변에서 출장 이발사를 불러보기로 했다.
파키스탄에서의 이발 비용은 매우 저렴하다.
2024년 기준해서 길거리 간이 이발은 100루피(500원), 도심 외곽 일반 이발소는 300루피(1천5백 원) 정도이며, 부동산 값 비싼 이슬라마바드 도심지 이발소도 500루피(2천5백 원) 면 깔끔하게 이발을 해 준다. 출장 이발사를 모셔오면 1,000루피. 한화 5천 원. 1만 원 밑으로 이발되는 곳을 찾기 힘든 요새 한국물가 생각하면 그래도 현저히 착한 가격이다.
약속시간이 조금 넘어서 이발사 분이 오셨다.
좀 기다리긴 했지만 이발 말고 오늘 아무 일정이 없으므로 문제 될 건 없다.
어쩌다 한 두 번 오시는 분이 아닌 것 같은 포스를 풍긴다. 연장 벨트를 개봉하니 빗, 가위, 전동이발기(=바리깡), 솔, 면도칼 등 이발용품이 촥~ 펼쳐진다. 장비 세팅 한 번에 완료.
현관 입구에 마침 플라스틱 간이의자도 있고 현관 유리를 거울삼아 가운 입고 앉으니 이발소 느낌이 살짝 난다. 살다살다 밖에서 자연바람 맞으며 이발해 보긴 처음이다.
이 이발사 분 꼼꼼하시네. 한 번에 안 자르고 조금 자르고 괜찮냐 물어보고 또 자르고 물어보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신다. 나 그리 까탈스런 고객 아닌데. 대충 짧게 안 불편하게만 잘라주심 되는데. 내가 여기서 머리 예쁘게 잘라본 들 누구한테 이쁘게 보일건가.
수 차 내 취향을 확인하고 이발을 마친 후 사진을 찍어 뒷모습 옆모습도 마음에 드는지 물어보고 확인을 받고 나서야 가운을 벗겨주신다. 친절하기도 하셔라.
여지껏 내가 만났던 대다수의 이발사분들은 영어를 거의 한 마디도 못 했었는데, 깡시골에서 부른 이 분, 영어가 매우매우 유창하다(파키스탄 사람이라고 다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통상 고등교육을 마치지 못한 사람들은 영어가 미숙하거나 한 마디도 못 하는 사람들도 많다).
"영어가 매우 유창하시네요?"
"아, 저는 영국에서 5년간 살다 왔어요. 이발 기술도 거기서 배웠구요~"
저 정도 손기술 있겠다, 영어 유창하겠다, 미국이나 호주 기술이민 가면 같은 시간에 10배는 더 벌 수 있을 텐데 해외서 왜 돌아오셨나 물어보려다가 너무 선 넘는 질문 같아서 도로 집어넣음. 영국에도 갔다 오신 분인데 뭐 개인 사정이 있겠지.
깔끔하게 이발 잘 마치고 처음 약속된 이발비 1,000루피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고, 쪼르륵 샤워실 가서 깨끗하게 머리 감고 개운한 마음으로 키보드 토닥이고 있다.
- 나갈 채비 할 필요 없다. 오가는 시간 절약
- 생활복 그대로 내 집에서 서비스받고 내 집에서 샤워 후 바로 환복. 찜찜할 겨를이 없다
- 운전사, 경호원 민폐 끼칠 일 없다
- 잘린 머리칼은 안 치워줌(청소 서비스까지 포함되진 않음)
- 이발소 방문 이발 대비 최소 2~3배 비쌈(그래도 한국보단 많이 저렴)
- 정확한 약속 방문시간 지키지 않음. 플러스 마이너스 한두 시간 정도는 그러려니 하고 기다려야 하므로 급할 때 부르면 낭패 볼 수 있음.
어쨌든 처음 받아본 출장 이발 서비스 체험기 끝.
이 나라가 불편한 게 한두 개가 아니긴 하지만, 여전히 착한 서비스 물가만큼은 참 마음에 드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