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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Oct 17. 2024

우리 지사장님이 그리니치 표준시 대비 빨리 늙는 이유

내가 늙는다 늙어......

 나는 파키스탄 모 시골마을에서 설비 운영하는 공장의 지사장.

 내가 어쩌다 여기서 지사장을 하고 있나 모르겠지만 오늘도 우리 지사 지사장님은 평소보다 빨리 늙는다.




제 1 막. 팩스가 고장났다.


"지사장님, 제어실에 있는 팩스가 고장이 났다고 합니다."


"그래요? 그럼 고쳐야지. 서비스센터 연락해서 수리비 얼만지 알아봐요."


(참고로, 요즘 시대에도 팩스를 쓰냐고 물어볼 수도 있는데, 현지 파키스탄 정부 시스템이란 게 그렇게 빨리 안 바뀐다. 내가 정부 시스템을 바꿀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냥 따라 쓴다.)


며칠 후.


"지사장님, 서비스 기사가 왔는데 히팅 드럼 갈아야하고 수리비는 75만원이라고 합니다. 승인해주세요."


"왓더??? 무슨 팩스 수리비가 75만원씩이나 해요?"


"아.. 그게, 저건 컬러프린터 복사기 팩스 복합기구요, 팩스는 그 기능 중 일부일 뿐인데 인쇄 기능 중 드럼이 맛이 가서 그렇다고 합니다. 수입품 동결조치 때문에 부품 구하기가 어렵대요."


"아니, 그럼, 새 팩스는 얼마나 하는데요?"


"안 알아봤는데요........"



스팀 팍. 빠지지지직... ㅡㅡ+


"........................................저 가격주고 고치느니, (좋은 말 할 때) 적정한 가격의 새 팩스 알아보세요. 팩스만 되는 단품은 새 제품도 얼마 안 합니다."


아니 대체 생각이란 걸 하고 말을 하는걸까. 한숨이 는다 늘어.


(참고로, 제어실에는 다른 종류의 복합기를 이미 보유 중이라 동일한 복합기가 불필요함을 서로 알고 있는 상태였다.)




제 2 막. 굴삭기를 고쳤다.


"지사장님, 굴삭기 정비 후 대금지급 결재서입니다."


"(뒤적 뒤적) 어, 이상하다. 이거 왜 기안서하고 대금지급서하고 금액 차이가 나죠?"


"어... 잠시만요. 이상하다 왜 그렇지? 아아~ 지사장님, 기안할 때는 서비스 부품가격과 서비스 인건비를 합쳐서 세액계산을 했는데, 정산결재 과정에서 서비스 부품 공급세율과 서비스 인건비 세율이 다른 걸 뒤늦게 인지해서 그걸 다시 계산해서 그래요."


".....그게, 어디 적혀있는데요?"


"(뒤적 뒤적 뒤적) 어딨더라. 어딘가 있었는데. 아아, 여기여기. (수십 장 뒤에 붙어있는 깨알 같은 손글씨)"


"(깊은 한숨)......그러니까, 나보고 이거 찾아서 알아서 읽어보라 그 말인 거죠?"



"..........."


"저는 결재승인권자입니다. 무언가 특기사항이 있으면 제가 물어보기 전에 정리해서 이슈보고를 해 주셔야죠. 안 걸리면 어물쩍 넘어가고, 걸리면 허둥대고. 계속 이렇게 할꺼예욧? ㅡㅡ++++++++"




제 3 막. 필터를 샀는데, 사다가 말았다.


"지사장님, 이번엔 오일 필터 구매대급 지급요청서입니다. 승인 부탁드립니다."


"(뒤적 뒤적) 어, 이거도 좀 이상한데요? 왜 구매청구서하고 대금지급서가 안 맞죠?"


"아, 그건 9개 항목 발주했는데, 재고가 없어서 8개 항목만 받아서 그렇습니다."


"그런 말이 여기 어디 적혀있죠?"


"바로 고 뒷장에... 납품 증빙 테이블에 1,2,3,5,6,7,8,9라고...."


"..............."


그랬다. 납품확인서에 확실히 4번이 안 보이긴 하다.


"그러니까, 나보고 앞으로 일일이 1번부터 100번까지 번호가 비었나 말았나 확인해 보라는 말인 거죠?"


"..............."


"이봐요. 구매담당. 나는 결재승인권자입니다. 내가 디테일한걸 어떻게 다 알아요? 그런데, 각종 대금 지급 업무에 최종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설명해주지 않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래서 지사장님이 여쭤보시면 제가 설명을....."



"(스팀 팍! 부글부글~~~) 이봐욧! 이런저런 특기사항은 갑지 머리에 Special Note 해서 특별한 경과사항을 요약해서 문서상 보고를 해야지 맨날 말로 때우려 하면 어떡합니까! 그리고, 내가 들을 때는 알더라도 어떻게 나중에 모든 걸 다 기억해요? 회사업무는 "문서"로 하는 겁니다. 말로 하는 게 아니라. 해당 사안을 문서로 설명하는데 몇 분이나 걸려요? 서너 줄만 쓰면 되겠구만. 최초 발주 000, 발주 보류 000, 최종 납품 000, 구매 금액 000, 차액 000. 이렇게만 해 줘도 좋겠다고요."




제 4 막. 팩스를 산다고 구매기안서를 가져왔다.


"지사장님, 지시하신 대로 시장에서 팩스머신을 좀 찾아봤습니다. 다만, 말씀하신 팩스 전용머신은 대부분 단종이라 요즘 시장에서 찾아보기가 어렵구요, 적절한 가격의 복합기를 찾아서 왔습니다. 여긴 파키스탄이라 가용할 수 있는 제품이 많지가 않아요."


"알겠습니다. 구매기안서 한번 봅시다."



"이게.... 끝???"


"네. 지사장님. 1번 제품이 제일 싸고 시장에서 구하기도 쉽습니다."


"그게.... 끝???"


"??? 뭐 더 궁금하신거라도?"


"1번 제품명이 HP Color LaserJet M000000 MONO????? 이게 물리적으로 가능한가요? 컬러 프린터인데 모노향이라니? 무슨 컨셉이지???"


"어, 그러네. 이상하네요. 음... 여기여기, 저, 그렇게 견적서 받았어요. 업체가 그렇게 적어줬어요. 여기 보세요. (증거 증거)"


"(깊은 빡침 후 숨고르기) 업체 견적서 징구 후에 제품사양 확인 안 합니까? 인터넷에 모델명만 쳐보면 어디서나 공개된 정보인데, 최소한의 크로스체크 정도는 해야죠. 하아. (직접 그 자리에서 인터넷 조사해 봄) 이거, Color 모델이 아니군요. 아니 이렇게 적어다 올리면 누가 이걸 흑백 모노 프린터라고 인지하겠어요? 담당자가 필터링 안 합니까?"


".................."


"그리고 미스터 ㅇㅇㅇ, 당신이 이 업무 담당자잖소. 그리고 당신이 시장조사를 해서 추천물품을 선정했다면서요? 당신이 정하면 끝인가요? 무엇을 어떻게 시장을 통해 조사했으며, 왜 그렇게 선정했는지 근거와 설명을 달아서 문서로 보고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신이 추천하면 내가 뭘 보고 결정하죠? 데이타라곤 제품명가격밖에 없는데? 각 제품의 스펙과 기능은? 사진은? 직원 선호도는? 그에 따른 장단점은? 유지비는? 아니, 내가 뭘 보고 판단해야 하는데??? 응??? 응?????"






 제1막만 빼놓고 모든 일은 "오늘" 중 벌어진 실화(제1막도 당연히 실화. 몇 주 전 이야기일 뿐).

 적당히 각색했지만 모든 대화는 파키스탄 현지 직원과 영어로 진행됨.


 오늘도 꼰대 외국인 지사장은 평소보다 빨리 늙고, 파키스탄은 여전히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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