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May 28. 2022

내가 왜 전화를 꼭 받아야 하지?

전화 수신 의무에 대한 고찰

 나는 어릴 적부터 전화받기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집에 하나밖에 없는 전화벨이 울리면 저 멀리 도망가기 일쑤였다. 이따금 울리는 전화벨은 공포에 가까웠다. 집안일하시느라 바쁜 어머니가 "아휴, 전화 좀 받아~~~"하시며 고래고래 소리치면 마지못해 받긴 했는데, 여보세요~ 대답 이후 얼어붙어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집 밖에 나가는 걸 무진장 싫어하고, 친구 사귀기도 힘들 만큼 혼자 노는걸 더 좋아했는데, 그 소중한 시간에 전화벨이 울리면 누가 우리 집 방문을 예고 없이 벌컹 열어젖히는 듯한 느낌이 정말 싫었고, 남 앞에서 무언가 한 마디 하려면 백번쯤 사전 연습하고 살며시 말하던 내 스타일 상 아무 준비 안 된 상태에서 건네는 전화기 너머의 말은 너무나 큰 스트레스였다.


 이불밖에 나가면 죽는 줄 알고, 남과의 관계도 매우 소심했던 아이가, 그래도 학교를 보내니 조금씩 적응하고 본성은 조금씩 숨겨가고 사회 평균 인력으로 교화되기 시작했고, 무탈하게 졸업하고 취업까지 성공했다. (오, 초 스피드 상황 전개. 순식간에 20년이 흐름)


 험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 번째 입사한 곳이 지금 다니는 회사. 사내에서 두 번째 보직으로 설비 감독관 직무를 부여받았다. 내가 맡은 직무는 공장 설비의 유지 보수 감독관 업무. 단 한시라도 고장이 나면 시간당 손실액이 수 천만 원 수 억 원 나는 설비가 고장 나지 않도록 정비계획을 잘 세우고, 이상 징후를 보이거나 돌발 고장 시 즉시 정비협력사를 호출하여 정비시키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업무 성격상, 정비 감독관에게는 문서에는 명기되지 않은 강한 의무가 부여되었다.


 "24시간 전화 수신 대기"


 병원으로 치면, 응급실 당직의사 또는 긴급환자 핫라인 이머전시 콜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돌발적인 고장이 나면, 실시간으로 매출 손실이 일어나므로 단 1초도 지체해서는 안 된다. 아, 그냥 일상 전화받는 것도 무지무지 싫어하는 타입인데, 24시간 족쇄라니. 월급 받아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다.



 당연하게도, 이머전시 콜은 때를 가리지 않는다. 주말은 말할 것도 없고, 남들 곤히 자는 새벽 시간은 물론, 설 명절 차례 지내다가도 긴급이라며 전화가 오고, 이발을 하거나 목욕하러 가도 전화가 온다. 전화를 안 받으면 안 되니까, 핸드폰이 방수가 안 되던 시절에는 목욕탕에 갈 때는 방수 지퍼백에 전화기를 넣어 들고 들어가곤 했다. 070으로 찍히는 회사 고유 국번의 전화번호가 뜨면 통화하기도 전에 머리가 쭈뼛 서면서 그게 그렇게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었다.



 내가 직원 때는 비상상황이 걸리면 설비담당 직원한테 다이렉트로 전화가 가는 게 회사 룰이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문화가 바뀌어서 "퇴근시간 이후 업무연락 금지"가 공론화되고, 법적으로 효력을 얻으면서 사내 노동조합 눈치를 살살 보더니, 이제는 비상상황 시 감독관을 제치고 노동조합 비호를 받지 못하는 상위 관리자한테 바로 전화가 간다.


"아니, 내가 직원 때는 나한테 전화하고, 내가 간부가 되니 또 나한테 전화하고."


 낀 세대는 억울하다.


 끔찍한 직무상 기억을 풀다 보니, 논제와 살짝 떨어진 사설이 길었다. 직무상 꼭 필요한, 월급 주니까 받아야 하는 직무 의무에 대해선 사실 큰 이견이 없다. 누군가는 고생해야 사회가 돌아가니까.


 전화 수신에 대한 또 다른 안 좋은 기억 하나.



 언젠가 금융상품 문의를 하러 금융사 창구를 방문했었다. 거의 30분 이상 대기를 해서야 내 차례가 되어 창구 상담을 했는데, 창구 카운터로 전화가 온다. 직원은 카운터 직통전화를 마지못해 받고 창구 데스크에 나를 멀뚱히 기다리게 하는 채로 한참을 통화해서 민원을 해결한다. 아니, 나는 당신이랑 몇 마디 하려고 30분을 기다렸다구요. 쟤는 뭔데 내 타이밍에 끼어들어 상담 새치기를 하죠? 하고 따지려다, 이미 녹초가 되어가는 창구 직원이 아련해 보여서 그냥 왔었다. 왜, 어딜 가나 전화는 "꼭 받아야 하는 것"이란 인식이 있는 걸까. 상황이 그러면 안 받을 수도 있는 거지.


 어쨌든, 어릴 적 기억과 태생적 성향 + 직무상 기억이 합쳐져서, 나는 여전히 사전고지 없는 전화받는 것이 너무너무너무 싫다. 전화벨이 울리면 좋은 기억은 하나도 없고 여전히 극도로 긴장한 심장이 자동빵으로 벌렁거릴 뿐이다.


 물론 전화란 얼마나 편리한 문명의 이기인가. 시공간을 초월해서 어디에 있어도 실시간으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원리를 이해하고 사는 공대생 출신이긴 하지만, 여전히 햐~ 신기하다. 마법이야 마법~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며 산다. 다 내려놓고 결과만 생각하면 판타지 수정구슬보다 백배 더 신기하고 효율적인 기술이다.


 버뜨. 나는 내 생활에 사전예고 없이 불쑥 들이닥치는 전화 벨소리가 너무 무례하다고 생각한다. 가정용 유선전화 시절이나 이동통신 초창기에는 오직 "직접 통화"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 그래도 이해한다. 2세대 이동통신 이후부터는 "문자"라는 훌륭한 에티켓 수단이 있지 않은가. 3G 이후부터는 카카오톡 등 모바일 메신저가 더 활성화된 시대이다. 나 급하니까 너 전화받아. 이건, 요즘 시대 너무나 무례한 태도이다. 매우 민감한 보안상, 비밀성의 논의를 할 게 아니라면, 메신저 소통으로 할 수 없는 건 없다. 꼭 통화가 필요하다면, 메신저를 보내서 언제 언제 통화하고 싶으니 괜찮은지 양해를 구해야 할 일 아닌가. 급하다고 해도 사실 통화해보면 진짜 급한일은 백에 한 둘 될까 말까 하더라.(논제와는 상관없지만 그래도 돈 보내달라는 메신저는 꼭 통화를 하자. 보이스피싱 많다.)


 물론, 요즘에는 스마트폰의 기능 중 "통화기능"은 옵션으로 취급될 만큼 통화의 빈도가 과거 대비 줄어가고 있고, 나처럼 통화에 부담을 느끼는 젊은 세대들이 늘어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3~40년 전 본인 급하면 전화부터 먼저 돌리는 관성이 남아계신 분도 많다는 게 문제다.


 언젠가부터 발신자 번호 서비스가 보편화되어서 요즘에는 전화를 가려 받기 무척 좋은 세상이다. 나는 성향상 내가 먼저 전화 거는 일은 아주 아주 아주 급한 일 아니면 거의 없을만큼 발신전화를 사용하지 않으며(거의 메신저로 해결), 내가 모르는 전화번호는 기본적으로 받지 않는다. 이미 99%가 대출안내, 보험상품 권유 등의 스팸일 뿐이며 스팸전화가 아닌 꼭 필요한 연락이면 문자나 카톡 등으로 어떻게든 연락이 다시 온다.


 무작정 전화벨이 울리는 건 내가 한 번 포스팅했다시피 "깜빡이도 안 켜고 남의 사생활에 불쑥 침범하는 일"이라고 강하게 강하게 주장하고 싶다. "너 왜 전화를 안 받아?"라고 묻는 게 당연히 무례한 세상이 되면 좋겠다.


 "이런저런 사유로 전화드리고 싶습니다. 언제 통화가 괜찮으실까요?"


 이런 문자나 카톡 한 번 남기는 게 그리 어렵나? 그게 요즘 시대 예의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설계 하자입니다. 고쳐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