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화산

0610_ 쉼의 의미

by Amy


“아빠, 나는 왜 이렇게 욕심이 많을까, 휴직하는 데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호기심이 많은 거지.”



교육학을 공부하다 보면 '조하리의 창'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나도 남도 잘 알고 있는 나, 나는 알지만 남은 모르는 나, 남은 아는데 나는 모르는 나, 나도 남도 모르는 나. 이렇게 네 영역으로 자아가 나눠진다고 했다.


사춘기 같은 마음으로 ‘부모님은 나를 다 알지 못해’라고 생각해도, 아무래도 남은 아는데 나는 모르는 나의 영역을 제일 많이 아는 사람은 우리 부모님이다.


욕심이 너무 많다고 나 자신을 안 좋게 생각할 때가 꽤 많았다. 바라는 게 많으면 현재에 쉽게 자족하지 못하고, 마음이 어딘지 모를 허공을 자꾸 떠돌 때가 많으니까. 그런데 아빠의 망설임 없는 대답은 그 관점을 조금 바꿀 수 있게 해 주었다. 역시 표현은 잘 못 해도 중요한 순간에 항상 날 믿어주고,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과 눈으로 날 바라봐주는 우리 아빠.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어도 나에게 맞는 최적의 방법으로 쉬는 법을 나는 배워가고 있다. 타인의 감정에 예민하고 관계를 중시해서 people person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뭐 맞지만 10년을 미루다 드디어 한 에니어그램 테스트에서 성취자 유형이 나오니 비로소 나도 나 자신이 더 납득이 간다.


매년 시한부처럼 산다. 이때만 할 수 있는 게 있어. 인생은 한 번뿐이고 이 시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현재를 즐기라는 어구인 '카르페 디엠'의 어원이 의미하는 바는 삶의 유한성이라고 한다. 죽음을 기억하며 주어진 현재를 최대한 즐기라는. 색채가 정말 달라 보이는 성경 속 전도서의 교훈도 결국 같다고 생각한다. 모든 건 결국 쇠하고 삶은 허무하다고 자꾸 외치니 얼핏 보면 삶에 대해 시니컬한 입장 같지만, 결국 그러니까 주어진 오늘을 최선으로 사는 것이 제일 지혜롭다는 교훈.



일은 쉬고, 제일 좋아하는 해외여행도 못 가고, 논문 학기만 남겨둔 대학원도 당장은 멈춰야만 하니 가끔은 팔다리가 잘린 기분이기도 하다. 언제 될지 모르는 임신을 위해 휴직을 한 게 과연 지혜로운 건가. 열심히 땀 흘려 쌓아놓은 나의 영어실력과 교사로서의 모든 노하우들이 녹스는 건 아닌가. 하지만 만 번 넘게 고민한 휴직을 결단한 이유도, 이때만 할 수 있는 일들도 분명히 있다. 은퇴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유 있고, 나만을 위해 내게 주어진 자원을 쓸 수 있는 시간 아닌가. 우매한 나는 또 언젠가 이 시기를 그리워하며 그때가 참 좋았지 할 테다.


이제는 약속이나 특별히 외식하고픈 메뉴가 없으면 내가 직접 해 먹는다. 남편의 아침과 저녁을 정성스레 챙겨준다. 피아노를 치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새로운 요리와 베이킹을 배우고, 발레공연을 보러 다니며 오랜만에 소녀처럼 좋아하고, 화실에 다닌다. 기약 없이 미뤄왔던 경제뉴스와 책도 꾸준히 읽으려 스터디도 하고, 드디어 행복한 문맹에서 조금씩 벗어나 히라가나를 읽는다. 에브리데이 선데이. 일할 때 그렇게 부러워했던 사람들의 일상처럼 매일을 여유롭게 내가 원하는 것들로 채운다.



역설적이게도 일이 내게 주고 있던 선물들도 비로소 깨닫는다. 여유+자유와 단조로움+지루함이 한 끗 차이 이듯이 스트레스와 분주함에 가려져 있던, 내가 구태여 만들지 않아도 주어지던 성취감과 보람을 발견해 낸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고,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기분. 학생들과 동료교사들과 함께 울고 웃던 순간.


때로는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족쇄와 철창처럼 느껴지던 공무원이라는 신분. 그 족쇄를 누군가는 휴직, 휴가 등을 비교적 자유롭게 해주는 안정성이라고 부르는 이유 또한 비로소 체감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래서 가끔 반복되던 일상과 흐름을 깨고 조금은 다른 시간을 갖는 게 필요한가 보다. 그 시간을 다른 행동들로 채우는 것 자체도 값지지만, 지금까지의 시간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감사할 수도, 앞으로의 태도를 다짐할 수도 있으니까.


결국 삶의 모든 순간이 값진 선물인 것 같다. 앞으로도 나는 한동안 삶의 모든 계절을 시한부처럼 살 거 같다. 근데 이왕이면 늘 한 발자국씩 성장하는 시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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