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했던 경험

0520_ like a ridiculous fairy tale

by Amy

미국 중부 지방 어딘가, 오레곤 주변이었다는 거 말고는 지역도 잘 기억이 안 난다. 뭐 이제는 10년이 지났으니까. 다만 우리가 묵었던 숙소인 홀리데이 인 마크와 그 방 안 침대 및 가구의 배치라던가, 깔려있던 회색 카페트의 감촉이라던가, 호텔방 문의 걸쇠가 금색이었던 건 기억난다.


20대 초반 돈이 없었던 우리는 홀리데이 인의 큰 방 세개에 여자 5명, 여자 6명, 남자 2명 이렇게 나눠자기로 하고 다 씻고서 남자방에서 모이기로 했다.


기숙사에서 10명의 자매들과 지지고 볶은지도 6개월, 믿을만한 남자애들 둘을 급히 추가하고 밴을 빌려 한달 간 엘에이에서 출발해 밴쿠버까지 찍는 서부여행을 시작한 이래로는 24시간을 붙어있으니 정말이지 나는 짧게나마 개인시간을 여유롭게 보내고 싶을 뿐이었다. 맨 마지막에 샤워하는 차례의 이점을 살려 보송보송한 몸에 옷을 입고 싶을 뿐이었다.


여행도 벌써 중반 피로한 몸에, 거의 숙소는 지인의 집에서 신세지던 처지였으니 오랜만에 호텔방 샤워실에서 편하게 씻는 것도 좋았고. 그 해 내내 누리지 못했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밖에 나와 기초화장품을 먼저 바르며 몸이 마를 충분한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아서 콧노래를 부르던 찰나에.


문이 열리고 자기 머리보다 높게 쌓인 여행짐가방을 든 파란 눈의 남자가 들어왔다. 너무 놀란 나는 졸지에 일어나버려서 어디에 몸의 일부라도 조금 가려지는 기회조차 놓쳐버린 채 정면으로 그 남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너무 놀라면 사람이 소리조차 지를 수 없다는 걸 그날 알았다. 그저 몇초간 서로의 커진 눈을 바라볼 수 밖에...


내 눈과 이성은 갈 길을 잃었는지 몇초 후 급히 달려나간 그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게 되었다. 쾅 닫힌 흰색 문에는 그 남자의 휘날리는 금발만큼이나 확연한 존재를 뽐내는 금색 걸쇠가 걸쳐져 있었다. 먼저 씻은 친구 중 한 명이 그날밤 모임에 필요한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가지러 들락날락해야해서 그런지 걸쇠를 걸어놓았나 보다.


소리라도 질렀으면 현실감이 있었을텐데 그러지도 못해 요상한 짧은 꿈을 꾼 기분이었다. 꿈 아니고, 퉁쳐줄게 라는 신의 장난꾸러기같은 면모였을까. 며칠 후 나도 제일 많은 사람들의 알몸을 참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뜨끈하게 보게 되었다.




오레곤은 그랜드 캐년이나 요세미티같이 잘 알려지고 압도하는 장엄한 자연과는 또 달랐다. 사람들 발이 비교적 닿지 않아 숨은 보물을 발견하는 기분. 야외온천으로 가는 숲길에서 한껏 초록초록한 나무들을 마주했다. 이파리에 매달려있던 이슬인지 빗물인지 모르겠는 물방울들이 햇살을 만나 스와로브스키처럼 반짝이며 대롱대롱 매달려있다가 몸을 부풀리며 떨어졌다. 요정의 숲에 몰래 들어온 기분이었던 게 생생하게 기억난다. 산 중턱인가에 생성되어있는 야외온천에 몸을 담그며 황홀했던 기분도 떠오른다. 어짜피 비가 왔다 안 왔다 했고 유교국가에서 온 우리들은 입었던 옷 그대로 맘껏 자연을 탐닉하다 온천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신께서 보시기에 그 평화로운 경탄만으로 그 날이 마무리되기는 아쉬웠나보다. 어디서 구했는지 궁금한 두툼하고 큰 이파리를 우산처럼 쓴 히피친구들이 종알종알 떠들며 우리 쪽으로 왔다. 그것만으로 진귀한 구경이었다. 허나 그들은 이파리우산을 내려놓고, 이내 몸에 걸친 모든 것 또한 바닥에 다 내려놓고는 남녀할 거 없이 아담한 온천물에 몸을 담갔다. 비는 오고 물은 따뜻해서 우리몸에서는 김이 나고, 앞 옆 어디에 눈을 둬도 초록색 아니면 살색.. 바로 일어나면 혹여나 민망할까 싶어 10분은 넘게 함께 있다가 조용히 도망쳐 나왔다.



산을 내려와 천을 건너야 다시 우리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비로 인해 그새 강물은 좀 불었고 우리 중에 가장 침착한 리더 언니의 폰이 떠내려갔다.


폰은 떠내려갔는데 우리는 정신없이 웃고. 비는 계속 내리고. 요절복통 빙글빙글 모든 게 예상을 벗어난 그 날들을 오랜만에 곱씹으니 참 모든 순간이 아름다웠다. 이런 기억으로 사람은 살아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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