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4_ 교직관의 변화
학생 시절에는 직업을 가지고 나면 진로 고민은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건 너무 천진한 과욕이었나 보다. 사람은 정녕 죽을 때까지 자신을 채 다 알아가지 못하는 존재가 맞는 듯하다. 나는 어쩌다가 교사가 되었나? 나는 은퇴 전까지 공교육에 종사하게 될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학창 시절 완전히 길을 잃었다. 자존감은 낮고 목표는 없이 생각만 많아지고 그런 거랑 상관없이 나는 공부를 잘해야 된다네. 잘하는 건 당연하고 못 하면 안 되는 듯한 기분에 늘 쫓겼다.
점심시간 내 팔짱을 끼고 교내 정원을 돌며 이것저것 아무 말을 들어주시던 고2 담임선생님이 생각이 난다. 가르쳐주셨던 독일어는 이히리베디히 빼고 다 날아갔으나, 우리 엄마와 통화하면서 내가 뭔가에 쫓기고 있는 거 같으니 공부만 강요하시기보다 마음을 봐달라고 이야기해 주셨다는 걸 전해 들었을 때의 내 감정은 여태 기억이 난다.
폭풍 같은 고3을 지나던 도중 신앙을 갖게 되고 사춘기 이후 처음 맛보는 편안한 마음 상태 정도는 되어 나중에 난 뭘 할까 고민할 여유가 생겼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안 보이는 것, 사람의 마음을 만지는 것이 실제적으로 더 큰 영향력이라 생각했다. 그 관점에서 제일 영향력이 지대하다고 판단한 문화 분야는 예체능은 너무 늦은 것 같아 탈락, 심리상담은 내가 감정적 중립을 못 지킬 것 같아 탈락. 그다음 영향력이 커 보였던 교육으로 일단락 짓고 그중 제일 좋아하는 과목인 영어를 골랐다. 잘 나가는 사립학교나 종교적 평안이라도 있는 기독교 대안학교라는 선택지보단 나같이 공립학교에서 겉으로는 안 그래 보여도 길을 잃은 아이들을 1년에 한 명이라도 돕고 싶었다.
천직인가 싶을 때도 있었다. 학생들을 사랑했고 학생들에게 사랑받았다. 어려운 걸 재미있게 가르치는 것도 어느 정도 자신 있었다. 계속 더 배우고 싶고 안주하기보다 발전하고 싶었다. 추가적으로 학교 밖의 새로운 일이 들어오면 인정받는 기분이었고 거절하지 않고 했다. 간혹 나보고 나이에 비해 뭘 많이 배우고 또 많이 이룬 교사라고 평해주기도 했다.
근데 너무 기울어져 있었나.. 내가 노력한 것에 비해 혹은 이전에 비해 만족감이 적으면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로 힘들어했다. 교사가 된 후 잘되는 상태가 기본값이 되어버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몰랐다. 용을 쓰고 또 쓰다가 완전히 소진되어 버렸다.
휴직 이후에 몇 달간은 학교 이야기는 듣기도 싫고 10대 학생들은 꼴 보기도 싫었다. 어찌나 많이 들리고 또 보이는지..
덥다 비가 오다 변덕스런 봄날씨를 반복하다 비로소 진정한 초여름이 되어가는 것 같은 이제서야 다시 학생들이 예뻐 보인다. 뭘 해서가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로, 채워져 있는 것보다 앞으로 채워나갈 것이 또 일궈나갈 것이 더 많은 그 어림과 순수함 자체가 귀해보인다.
그래 나는 그 맑음을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함께 하고 함께 일궈가는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다만 너무 끌어다 써서 HP가 완전히 고갈된 것뿐이었구나.. 누구도 나에게 짐 지우지 않았는데 스스로 너무 많은 짐을 지고, 혼자 일하는 쉐르파처럼 매일 단시간에 먼 길을 너무 꾸역꾸역 걸어가 버려서 머리고 어깨고 너무 다 무겁고 아팠던 걸까.
휴직 이후 때로 멈춰있는 듯한, 내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훌륭한 교사는 딱히 없다. 비스무리한 존재가 있다면 아마도 그건 학교에 출근하는 여유 있고 행복한 개인일 뿐. 그 개인이 학생들보다 이 땅에 조금 더 일찍 태어나 먼저 길을 좀 더 걸었고, 학생들이 걸을 길 옆에 한동안 함께 하는 것뿐이다. 자신의 마음에 그 정도의 여유는 남아있어서 버겁지 않은 정도로 동행하는 동안 즐거운 대화를 나눌 뿐이다.
때로는 학생들한테 짐을 직접 들도록 넘겨도 되고, 나도 앉아서 죄책감없이 잠시 쉬어도 된다. 마실 물이 있으면 같이 나눠마시고 힘들면 같이 불평하고 맛있는 간식을 먹으며 잠시 웃고 또 같이 일어나서 걸어가면 된다. 혼자 가면 심심하고 외로워 통증에 집중하게 되지만 같이 떠들다 보면 모르는 새 도착해있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도 나중에 돌아보면 같이 웃을 일들이 생기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