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서리가위(Trimmer)

0508_ 가족

by Amy

새 학기면 대부분의 교사들은 학번이 포함된 학생들의 이름표를 만든다. 사물함이나 책걸상, 신발함 앞에 붙이라고. 학생들 이름이 생각이 안 날 때 교사들의 컨닝페이퍼가 되기도 하는 건 안 비밀. 이왕이면 만드는 사람도 붙이는 사람과 보는 사람도 기분 좋으라고 카카오프렌즈와 같은 캐릭터 하나 넣고 코팅해서 깔끔히 자른다.


바쁜 새 학기에 이 정도도 충분한 정성이라 생각했는데 트리머라는 모서리가위를 사비로 구매해서 이름표의 네 모서리를 둥글게 잘라주는 동료교사가 있었다. 혹시라도 붙일 때나 책상에서 지우개를 쓰다가 날카로운 모서리에 찔리지 말라고. 나는 저렇게까지는 못하겠다고 했는데, 그 선생님의 미소와 닮은 그 세심한 따뜻함이 지금까지 종종 떠오른다.


내 남편은 우리 집의 모서리가위다. 사물함, 책걸상, 신발장까지 36명 곱하기 4개씩인 이름표 모서리가위질까지 하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효율적인데. 이름표 따위 대부분의 학생들은 기억도 못 하는데, 굳이 해야 하나 싶은데 그 사소한 다정함은 누군가의 마음 깊은 곳에 묵직하게 쌓여 오래도록 기억에 자리 잡는다.



남편의 일상 속 사소한 배려가 그렇다. 내가 때로 짜증이 나서 습관처럼 마음을 찌르는 말만 골라서 입으로 배설할 때, 유독 지치는 하루의 끝자락에서, 무심하게 뚱한 얼굴로 아침을 시작할 때.


남편은 차분히 '그렇게 말하면 나도 기분이 좋지 않아 네가 원하는 게 그게 아니잖아'라고 나를 가라앉혀주어 더 이상의 후회를 만들지 않게 해 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며 내가 편히 잠들 수 있게 팔베개를 해주고, 팬티바람으로 아침부터 춤을 추며 새로운 하루하루가 선물임을 일깨워준다.


자신의 구아바나무를 늘 푸르게 돌보는 바로 그 예쁜 마음으로 나의 삐죽삐죽 모난 가지들을 예쁘게 다듬어준다.




서로 사무치게 사랑하면서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꺼내보여 주기가 어려웠던 우리 엄마아빠하고도. 사춘기 자녀가 있는 가정에 귀엽고 듬직한 강아지 한 마리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 주고 서로 마주 보며 웃게 해 주듯. 사랑한다고 말로 또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는 둥근 안정감이 되어준다. 사위가 들어오기 전 가족이라는 글자가 궁서체로 쓰여있었다면 이젠 굴림체로 다시 쓰여진 것 같다.



그 자연스러운 일상 속 노고에 힘입어 나도 그 가위가 녹슬지 않도록 잘 돌봐주고 더욱 아껴줘야지. 둘 다 머리가 하얗게 새어도 남편이 여전히 팬티바람으로 아침댓바람부터 춤출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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