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헬렌에게 너의 에이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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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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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피부를 맞대고 삶을 부대꼈던 시간이 1년 남짓이라 해도 저런 거창한 표현을 쓸 수 있는 걸까.


인생의 다른 요소들이 모두 그렇듯, 시간에 있어서도 펼쳐진 기간의 스펙트럼만큼이나 얼마나 옹골차게 압축되었는가와 같은 명도(혹은 밀도) 또한 중요한 것 같다. 특히 인간 대 인간이 주고받은 마음과 관계에 있어서는 더더욱.




너의 일을 나의 일처럼 마음 아파하고 같이 울던 때가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 10년 넘게 지속된 너의 불면을 애처로워하며 니가 잠들기까지 핸드폰을 잡고 내 졸린 눈을 애써 부빈 나날이 기억난다. 잠은 하나도 못 자고 학교 갔다가 바로 식당에 가 몇 시간을 서빙하고 비몽사몽 그 위험한 하이웨이를 또 1시간 넘게 달려 집에 돌아가던 너. 운전 중 잠들까 걱정돼 전화하며 어떻게든 널 깨우려 노력했던 게 기억이 난다.


설렘, 육체적 쾌락, 혈연관계, 그것도 아니면 오래도록 같이 만들어온 추억들 없이도 누군가에게 그런 마음을 느끼고 서로 상처를 보여주고 껴안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 시절에 우리를 묶어준 끈은 뭐였을까. 그때, 거기서, 우리가 만난 것도 일종의 운명이지 않을까.




한국에서 사춘기 학생들을 가르치며 니가 문득 떠오를 때도 많았다. 학교에서 마음이 아픈 아이들이 나를 유독 편하게 생각하는 데도 너의 덕이 크다. 너를 통해 배우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 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끔찍한 일도 많이 알게 되지만, 나는 어느 정도 감정적 중립을 잘 유지하며 내가 기쁘게 할 수 있는 만큼 그 아이들을 기꺼이 안아줄 수 있게 되었다.


너에게 배웠던 피아노와 기타 기본 코드들로 곡을 연주하고 직접 노래하는 게 나만의 호흡이었던 시절이 있었지. 10년이 지나서 이제서야 너한테 배운 것 이상의 코드와 반주법을 배운다.


근 10년 동안도 세계 곳곳의 테마파크를 참 많이 갔지만, 아직도 너와 갔던 LA 디즈니랜드를 잊지 못한다. 내 마음에 한으로 맺혀있는 디즈니랜드를 구석구석 데리고 다니며 함께 웃고 떠들고. 처음 탈 때 소리 지르다 침까지 흘렸던, 우주로 가는 내 최애 라이드는 알바 중이던 네 친구 덕에 줄도 안 서고 두 번이나 탔었지. 먹어야 할 것도 다 먹고 불꽃놀이까지 보고 심지어 낮잠까지 계획적으로 챙겨자고. 새벽 6시에 출발해 12시에 돌아왔지만 그때만큼 내 피가 하루 종일 쌩쌩 빨리 돈 날도 참 흔치 않다.




내 마음을 너무나 잘 읽어주던 너.. 여전히 그 순간들은 내게 보석 같아, 고마워. 그때는 내가 주는 게 더 많다고만 생각해서 미안해.




우리는 각자의 터전에서 각자의 남편과 결혼도 하고 직업도 가지며 삶을 꾸려나갔다. 어쩌다 보니 내 마음의 2번째 고향, LA에 10년 동안 돌아가지도 못해서 니가 한국 방문해 준 때가 마지막 만남이네. 연락도 가끔 하고. 여전히 너는 나에게 서운함이 남아있을 수도 있겠지.


나를 보러 한국에까지 방문해 준 너는 미국에 돌아가면 이제 못 만나니까 매일 연락하고 깊이 함께 하길 바랬고, 나에게는 그건 그때도 지금도 무리였다. 어쩌면 내 미국 생활은 끝이 정해져 있었으니까 너의 삶의 모든 무게를 내게 뱉어내는 것이 괜찮았었던 것 같아. 한국에 돌아오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되 각자의 삶을 살아가리라 예상했었고, 그게 니 예상이랑 달랐고.




그때는 서운했을지라도 이제는 나를 좀 더 이해하지? 부디 그렇기를 이기적이게도, 하지만 또 너를 위해서도 바래본다.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처음 말한 내가 꼭 니 곁에 없어도, 혹은 그 비슷한 존재가 니 곁에 어쩌다 부재하는 때가 생겨도, 니가 항상 평안하고 행복하길 바래. 그리고 내가 아는 너는 그런 사람이 이미 되어있을 거라고 어느 정도는 확신해.


너로 인해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되었어. 연인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우리는 정말 우리의 발가벗은 영혼을 있는 그대로 꺼내놓고 그대로 사랑했잖아. 남과 정의가 좀 다를지 몰라도 넌 내게 쏘울메이트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해. 그래서인지 내 일상에서는 여전히 너의 흔적이 꽤나 남아있어.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우리가 함께 한 젊은 날은 찬란했고, 좀 더 푸근하게 만날 그 언젠가를 고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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