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몸으로는 느껴본 적 없는 낯선 피로
해외여행을 너무 사랑하고, 체력보다는 새로운 곳을 얼른 탐험하고 싶은 호기심이 더 앞섰던 터라 낮잠을 자고 여행을 시작하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사실 그랬던 적이 있었던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임신한 몸은 다르구나... 이번 여행에는 샬로미와 나의 건강과 체력을 최우선으로 두고 여유를 누리려 왔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짧게라도 눈을 붙이고 나니 저녁에 더 예쁘다는 아메리칸 빌리지의 풍경이 너무너무 궁금해졌다. 남편과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
남편의 감기약을 먼저 구매하고, 오키나와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는 타코라이스를 먹었다. 타코라이스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있어 반신반의하던 남편의 이번 여행 최고 맛도리 타코라이스! 만족스러운 저녁식사 후 구경하는 크리스마스 시즌의 아메리칸 빌리지. 역사적 배경은 슬프지만 하루 구경하기에 눈과 마음은 너무나 즐거운 곳이었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반짝반짝. 워낙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나지만 입덧과 임신과정에서 찾아온 귀차니즘으로 정말 오랜만에 새로운 곳에 왔다! 휘황찬란한 광경과 아기자기한 상점들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고민과 걱정에 휩싸였던 나를 데려와준 남편 정말 고마워... 그렇게 아메리칸 빌리지를 한 바퀴 돌고 나니 또다시 다리가 너무너무 아팠다. 그 정도로 걷지도 않았는데.. 달라진 몸 상태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블루씰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먹고 귀가했다.
느껴본 적 없는 피로... 임신 전에 체력이 그렇게 안 좋은 편도 아니고, 여행지에 오면 설렘이 피로를 덮었던 터라 정말 낯선 육체적 상태와 감정이었다. 임신 기간에 휴직 중이었으니 아무리 운동을 챙겨하고 많은 활동을 한다 해도 이토록 피곤한 적은 처음이었다. 또다시 걱정과 불안이 몰려왔다. 감기에 걸린 남편은 대욕장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지지기로 하고, 나는 초스피드로 샤워를 하고 최고효율의 동선으로 화장품을 바른 후 거진 10분 안에 침대에 몸을 눕혔다.
‘샬로마 너 괜찮지? 움직여봐~'하고 가만히 누워 배에 손을 얹었다. 한참 후 꼬물꼬물 움직이는 샬로미를 느끼고서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내가 엄마가 되기는 했나.. 그토록 좋아하는 해외여행을 왔는데 나의 모든 관심사와 레이더망은 샬로미를 향해 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으나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쉬니 정말 살 것 같았다.
한참 후 대욕장에 다녀와 유카타 차림인 남편은 그 앞 자판기에서 파는 우유를 사 와 내 앞에서 시원하게 들이켠다. "캬- 이 맛이지-" 감기기운에, 하루 종일 임산부를 챙긴 피로에도 뜨뜻한 목욕과 시원한 우유 한 잔에 감사하고 행복해하는 남편을 보며 생각한다. '그래- 이게 행복이지, 이 사람과 미래를 꿈꿀 수 있던 건 이런 거 때문이지.' 유카타 차림은 왜 이리 잘 어울리는지 괜히 남편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누운 채로 찰칵찰칵 사진도 몇 장 찍어둔다. 감기에 옮지 않기 위해 정말 오래간만에 따로 침대를 쓴다. 그래도 역시 남편이 한 방에, 옆에라도 있어야 잠이 온다...
다음 날, 과연 이 피로가 풀릴까 싶었는데 인체의 신비란 참으로 놀랍다. 욱신거리던 다리도, 마이너스 상태였던 체력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 비도 살살 오고 어제 깜짝 놀랐던 체력 이슈로 오늘은 더욱더 여유롭게 여행하기로 한다.
원래는 북쪽 야외 코스를 계획했으나 비가 오길래 츄라우미 수족관을 오늘 가기로 하고, 여유롭게 조식을 먹으러 갔다. 얼마 만에 호텔 조식인가..? 물론 여행지에서 맘에 드는 브런치와 커피 한 잔을 하는 그 만족스러움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역시나 나는 조식서비스 미신청을 여전히 선호하지만, 호텔 조식은 참 편하긴 하다.
이것저것 다 가져다 먹고 지바고 커피로 향해 남편은 커피 한 잔을, 나는 핫코코 한 잔을 시켜 여유를 누린다. 바깥에 비치된 테이블에 앉아 주변을 구경할 만큼 오키나와의 12월은 따뜻하다. 귀여운 3-4살짜리들이 온 힘을 다해 킥보드를 타는 모습을 구경한 후 호텔로 돌아와 외부에 비치된 족욕장에 발을 담갔다. 이게 행복이지... 전날에 다리에 잔뜩 쌓였던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옆에 앉으셨던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어려 보이는데 임신한 부부인 게 신기하신지 이것저것 말을 건네신다. 짧은 일본어로 따스한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어내고, 수족관으로 향했다.
츄라우미 수족관은 정말 컸다. 수족관에 올 때마다 생각한다. 신은 존재한다고... 있는지 존재조차도 모르는 다양한 해양생물들이 그들만의 체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게 너무나 신기하다. 각자만의 자기 보호시스템, 무리를 이루는 과정, 알을 품는 방법... 아름답고 신비로운 심해 세계에 푹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또 다리가 아프다..! 가장 고대했던 돌고래쇼를 보러 앉았는데 아뿔싸 배가 뭉친다....
원래 임신 중기가 되면 배 뭉침이 종종 있다고 하는데 첫 배 뭉침을 낯선 오키나와 땅에서 겪으니 무섭고 불안했다. 한껏 딱딱해진 배를 부여잡고 앉아서 심호흡을 하는데 몸이 너무나 힘들었다.
그 와중에 돌고래쇼는 눈물이 살짝 나올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어찌나 저렇게 영특하고 사랑스러운지,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고 호르몬의 농간인지 주책맞게 눈물이 살짝 났다. 문제는 이제 돌아가는 것.... 이미 퉁퉁 부은 다리와 뭉친 배를 이끌고 꽤나 넓은 츄라우미 수족관에서 다시 주차장까지 돌아갈 생각만 해도 아득했다.
결국 오늘의 일정은 이것으로 끝...! 묵게 된 게스트하우스의 친절한 사장님이 주변 로컬 맛집부터 마트음식까지 소개해주셨건만, 피로가 온몸을 뒤덮어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웠다. 정말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로구나... 누워서 함께 흑백요리사2를 보며 남편에게 물었다. "나야 뭐 피곤하니까 쉬는 게 지금 너무 좋은데, 너는 오랜만에 해외여행에서 아쉽지 않아? 미안해." 무한 긍정 우리 남편은 쉬는 것도 좋다고 한다. 여전히 꼬물꼬물 잘 움직이고 팡팡 발로 배를 차는 샬로미.. 그 존재만으로 너무나 사랑스럽고, 안심이 되고, 고맙다. 둘째 날은 9시가 채 되기 전에 결국 단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