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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라희 Oct 30. 2022

[예술가] 별종은 끝내, 승리한다-페기 구겐하임

-      영화 <페기 구겐하임: 아트 애딕트>

그 도시가 나를 부르는 이유

Peggy Guggenheim: Art Addict © SUBMARINE DELUXE


이탈리아 베네치아 여행에 가면 꼭 가봐야 할 곳이 있다. 세계에서 방문객이 가장 많은 근현대미술관으로 손꼽히는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이다. 지인이 이곳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때부터 나만의 여행 버킷리스트 중 한 곳으로 자리 잡았다. 베네치아는 페기 구겐하임에게 제2의 고향과 같은 곳이니 그에 대해 알고 나면 정서적 교류를 원해서라도 그 발자취를 찾아가고픈 곳이기도 하다. 나와 같이 그곳에 가보고 싶어 그 나라를 여행하겠다고 마음먹는 이들이 많은 걸 보면, 한 인물이 도시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끼친 영향력이 실로 대단하다. 

페기 구겐하임(Marguerite Guggenheim, 1898~1979)은 스스로를 ‘예술 중독자’로 칭할 만큼 예술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인물이다. 벤자민 구겐하임의 둘째 딸로,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로 숨을 거둔 아버지의 재산을 스물한 살에 물려받았다. 예술에 대한 안목을 바탕으로 수많은 예술가를 발굴하고 후원하며 작품을 수집해 세계에 알렸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동하며 특히 오늘날 현대미술이 자리를 잡는데 크게 공헌하여 전설적인 콜렉터로 불린다.

그의 삶과 철학을 단편적으로나마 들여다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페기 구겐하임: 아트 애딕트 Peggy Guggenheim: Art Addict>(2017)를 찾아보았다. 이 작품을 만든 리사 이모르디노 브릴랜드 감독은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미술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한 세기를 산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이자 아이콘으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고 했다. 또한 역사의 흐름에 맞물린 인물이자, 미술사에 엄청난 기여를 한 인물이며, 용기 있는 여성이기에 매력적이었다고 말한다.

결정적으로 이 작품이 완성되는데 추진력을 준 계기는 취재 중 발굴된 녹음테이프였다. 페기 구겐하임은 81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 두 해 여름 동안 자신의 전기 작가 재클린 웰드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리사 이모르디노 브릴랜드 감독은 그중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던 테이프를 중심으로 삼아, 이전에 구성한 내용과 자료를 뒤엎고 새롭게 작업을 해 영화를 내놓았다. 따라서 이 영화는 전기 작가 재클린 웰드와의 인터뷰가 큰 축을 차지하면서 그 사이에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겪어내며 예술 수집가로서의 자신을 세상에 바로 세운 페기 구겐하임의 이야기를 담는다.



아픔을 씹어내 찬란한 꽃으로

Peggy Guggenheim: Art Addict © SUBMARINE DELUXE


다큐멘터리 영화 <페기 구겐하임: 아트 애딕트>를 통해 페기 구겐하임의 다양한 면모를 알게 됐다. 전면에 다가온 역사적 물결에 굳건히 맞서고 주어진 삶에 안주하지 않고 개척한 인물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부단히 노력한 인물이었다. 그 가운데 페기 구겐하임이 겪고 이겨내야 했던 엄청난 비극과 슬픔이 오롯이 다가왔다. 인물 다큐멘터리 영화가 주는 힘이었다.

페기 구겐하임의 삶을 들여다보며 주목한 데에는 그가 주어진 삶을 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했다는 점이었다. 사실 페기는 구겐하임 가문의 상속녀 정도로 안락하게 살 수도 있었다. 그와 같은 상속자와 적당히 결혼을 하고 넘치는 부를 누리며 평생을 그들만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살기엔 이미 구겐하임 가문에서도 ‘별종’으로 유명했다. 브루클린 억양을 일부러 배워 쓴다거나 눈썹을 밀어버리는 괴이한 행동을 일삼았다. 반항적이고 자유로운 사고방식의 그를 가둬버릴 족쇄는 없었다.

그래서 페기 구겐하임에게는 가난하지만 예술적 정서가 통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게 우선순위였다.  그는 자신이 경멸했던 부르주아적이고 따분한 삶에서 벗어나 보헤미안 세계에 심취한 작가 겸 화가 로렌스 베일을 만나 예술 세계에 들어섰다. 더구나 당시 예술적 혁명이 일어나던 파리에서의 생활은 페기 구겐하임이 당대의 수많은 예술가와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끊임없는 지적 호기심으로 파리 카페에 앉아 초현실주의와 큐비즘에 빠져들며 그 시대의 사상을 흡수했다. 대학에 가는 대신 독학으로 그 모든 예술적 자양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페기의 굴곡진 인생에는 슬픔이 많았다. 첫 남편과는 아이 둘을 낳았지만 구타를 견딜 수 없어 이혼했고, 인생에서 자신을 가장 아끼고 진지하게 이끌어주었던 존 홈즈는 손목 수술의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해 서른여섯에 사별했다. 하나뿐인 아들 신바드는 아버지에게 보낸 후 원망을 사 평생 척을 지고 지냈고 딸 페긴은 우울증 약을 먹은 후 사망한 채 발견됐다. 동생 헤이즐의 아이들이 호텔 지붕 난간에서 떨어져 죽어 두 조카를 한꺼번에 잃기도 했다. 정신적 공허함으로 인해 만났던 수많은 남자들은 그를 잠자리 상대로 이용할 뿐이었다.

Peggy Guggenheim: Art Addict © SUBMARINE DELUXE


그럼에도 페기 구겐하임은 자신의 정신적 목표를 향해 나아간 사람이었다. 영국 런던에서 화랑을 열고 마르셀 뒤샹을 비롯한 수많은 화가의 조언을 받아 예술적 안목을 길렀다. 그를 통해 페기 구겐하임은 부르주아계에서 늘 이방인이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현대미술과 아방가르드의 감성을 통해 자신을 발견했다. 평범한 일상의 물건들이 예술가들의 선택에 의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탄생될 수 있다는 것을 유럽 사회에 널리 알렸고 이는 곧 현대미술이라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페기는 정말 예술에 끌렸기 때문에 수집을 했어요.

작품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죠.

또 자신의 신념을 과감하게 밀고 나갔어요.

기꺼이 위험을 감수했고 작품이 가진 미술사적 중요성을 본능적으로 이해했지요.

-      <Peggy Guggenheim: Art Addict> 인터뷰 중



시간이 답해준 그의 현명한 선택

Peggy Guggenheim: Art Addict © SUBMARINE DELUXE


페기 구겐하임의 안목을 통해 발굴되고 한층 성장한 예술가는 셀 수 없이 많다. 그중 잭슨 폴락과 칸딘스키의 사례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당시 신진 화가였던 잭슨 폴락에게는 큰돈을 빌려 자연 속 집을 사게 하고 대지에 캔버스를 펼쳐놓고 대형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또한 당시 외면받던 칸딘스키의 가능성을 보고 영국에서의 첫 전시를 열어줄 만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뒤이어 화랑을 접고 런던에 미술관을 세우려던 계획은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며 무산되고, 현대미술은 나치에 의해 ‘퇴폐 미술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공개된다. 페기 구겐하임이 수집하던 현대미술 작품들은 그들이 말하는 ‘퇴폐 미술’이었기에 독일군의 강제수용소에 잡힐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현대미술에 대한 신념과 애정으로 인해 겁이 없었다고. 작품을 두고 갈 수 없었던 그는 살림살이와 함께 작품을 부단히 미국으로 실어 날랐다. 한창 전쟁이고 망명자들도 많은 가운데 자신의 목숨보다는 작품을 지키려 모든 것을 걸었다. 나아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미국 망명도 도우며 그들의 목숨 또한 구했다.

이후 뉴욕 화랑에서 현대미술계에서도 획기적인 전시를 열고 또한 베네치아에 자리를 잡으며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일하는 여성으로서 동등하게 함께했던 그의 존재는 거의 유일했다. 

페기 구겐하임이 일생에 거쳐 계속 변모할 수 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자신 안의 목소리를 듣고 그에 따르는 과감하고 용기 있는 행동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그는 작품을 들일 때 자신의 신념을 바탕으로 전문가의 조언에 귀 기울였지만 늘 조롱과 경멸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 진가를 인정받은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품을 베네치아에 가져왔고 비엔날레에 선보이면서 예술도시로서의 위상을 드높인 그의 공로가 눈에 띈다.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을 지으며 그의 삼촌이 설립한 솔로몬 재단이 그간의 컬렉션을 귀속한 사건은 큐레이터 힐라 리베이 남작부인을 비롯해 전시를 거부했던 루브르 박물관 등 자신의 컬렉션을 두고 쓰레기라고 폄하했던 일에 대한 일종의 복수가 된 셈이었다.

 

인터뷰어: 지금 이 폴록 작품은 금세기 미술 화랑이 전성기일 때 작품이니까..(중략)

값이 올라서 뿌듯하겠네요.

페기: 아뇨, 그림 값이 너무 터무니없이 치솟는 것 같아요. 

미술관 관장들이 찾아와서는 이 그림은 얼마 나가고 

저 그림은 얼마 나간다고 하면 난 너무 화가 났어요.

비싼 그림을 소유하는 게 엄청난 책임이라고 생각했어요. 돈으로만 보는 게 싫었어요.

-      <Peggy Guggenheim: Art Addict> 인터뷰 중



세상의 별종을 향한 찬가

Peggy Guggenheim: Art Addict © SUBMARINE DELUXE


세상은 남다른 이들의 행보로 인해 마치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그러나 꾸준하게 변해간다. 페기 구겐하임과 같이 뭔가 특별한 이들을 별종이라고들 칭한다. 그러나 ‘별종’이라는 말에 담긴 느낌은 물론 독특하고 유별난 존재라는 뜻도 있지만 우리와는 다른 사람, 함께하기에 어렵고 힘든 사람이라는 의미도 담긴다. 그 대상과는 또 다른 무리를 가르는 말이기도 하다. 별종과 같은 이들로 인해 세상은 멈춰 있지 않고 매 순간 변화한다. 그들로 인해 사람들은 생각의 전환을 갖게 되고 저마다 조금씩 변화를 추구해본다. 이 세상에 별종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페기 구겐하임은 여러 측면에서 진정한 별종이었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부르주아적인 구겐하임 가문에서 그의 존재를 입에 올리고 싶어 하지 않을 정도로 ‘괴짜스러운’ 행동을 이어갔다. 남들이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쳐다보지도 않던 작품과 예술가들을 조명하는 ‘특별함’과 특유의 꾸준함으로 결국 그들을 현대미술의 반열에 올렸다.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정서적, 문화적 소통이 잘 되는 이들과 어울리기를 꺼리지 않았고 그로 인한 육체적 관계에 있어서도 가감 없이 공개하는 ‘별스러움’으로 자신에 충실한 삶을 살아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 시선에 갇혀 살았다면 그 어느 것도 성취해내지 못했을 수많은 것들이었다.

별종에 담긴 색안경, 편견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들은 길지 않은 인생의 시간 동안 좁고 작게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잣대를 들이대길 좋아한다. 그렇게 경계선을 긋고 자신과 비슷한 이들을 한 무리로 묶어 소속감을 느끼며 그 안에서 안락함을 느끼고 안주하고 싶어 한다. 예술을 통해 세상의 규칙을 깨는 사람들을 세상은 예술가라고 하지만 난 별종이라고 칭하고 싶다. 

페기 구겐하임의 삶을 통해 세상은 별종들의 힘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금 주지해야 한다. 여성에 대한 엄격한 잣대와 편견에 갇혀 그가 예술계에서 그 같은 활동을 하지 못했더라면,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충실한 행동을 그토록 당당하게 공개하지 못했더라면, 전쟁의 위험을 감수하고 작품과 예술가들을 지켜내지 못했더라면. 그의 삶은 우리의 마음속에 그만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까. 한 사람의 삶은 그래서 고귀하다.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도 크든 작든 엄연히 존재한다. 나는, 우리는 별종을 사랑한다. 그렇게 별종은 끝내, 승리한다.


위대한 예술은 영원합니다. 페기가 그랬던 것처럼 

올바른 방향으로 예술을 진정으로 깊이 사랑할 수 있다면

어떤 불멸성을 얻게 되죠.

-      <Peggy Guggenheim: Art Addict>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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