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영화] 평화를 위한 댓가는-권력쟁탈3000년

영화 <영광의 길> & 도서 <권력쟁탈 3000년>

by 오색빛깔 라희뷰

마주한 현실과 똑 닮은 영화

<Paths Of Glory> © United Artists


한 나라 지도자의 독선과 아집으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소중한 목숨을 빼앗기고 있다. 도시 곳곳이 시신들이 즐비하고 각종 건물은 불타고 파괴되어 예전의 평화로운 일상은 찾아볼 수도 없이 참혹하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민간인 사상자만 3만 명이 넘어선 것으로 집계되고 있고, 러시아에서는 동원령에 의해 징집된 신병이 전선에 투입된 지 며칠 만에 전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른다. 이처럼 희생된 이들의 이름을 역사가 일일이 헤아릴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전 세계인들은 이에 무기력감에 빠져 있다. 이 전쟁이 어떻게 해서든 그저 끝나기만 바랄 뿐, 딱히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도 어렵다. 전쟁의 명분은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고, 명분이 있다 해도 현재와 같이 참담한 상황 앞에 어떠한 명분이 앞설 수 있을지도 회의적이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영광의 길, Paths Of Glory>(1957)은 개봉한 지 무려 65여 년이 지났지만 마치 우리가 마주한 지금 여기의 현실인 듯 여전히 유효한 주제를 전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그린 험프리 코브의 소설을 영화화했다는데, 제3차 세계대전의 발발 가능성을 논하는 2022년 현재를 관통하기도 해 마음이 쓰리다.

영화 <영광의 길>은 무자비하면서도 무능한 전쟁 지휘자에 의한 비극을 이성적이지만 강렬하게 그려낸다. 독일군과 대치 중인 프랑스군의 총사령관 브롤라드는 개미 고지를 3일 안에 탈환 해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병력 손실과 무기적 수세로 인한 병사들의 전사율을 예상하면서도 승진에 눈먼 사단장 미로는 전투를 감행한다. 명령 체계의 의해 닥스 대령은 어쩔 수 없이 전투를 수행하지만, 무모한 작전은 끔찍한 희생을 부른다. 이를 본 군인들은 참호를 떠나길 거부하며, 이에 화가 난 미로 장군은 포병대에게 대포를 아군의 참호에 발사하라고 명하지만 거부당한다.

사단장 미로는 작전 실패의 원인을 부하들의 비겁함으로 돌려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사단에서 한 명씩 색출해 본보기용으로 처형하려 한다. 이러한 처사에 분노한 닥스 대령은 차출된 이들이 무고하며 실은 가장 용감했던 병사들이라는 것을 역으로 알리며 필사적으로 변호를 하지만, 사단장의 만행을 알고도 묵인하는 총사령관으로 인해 결국 병사 셋은 총살을 당한다.

전쟁의 결정권자와 행위자의 불일치로 인해 빚어지는 비극을 차분하면서도 암울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전쟁 상황에서 군 조직 내 인권이 어떻게 짓밟히는지 여실하게 보여준다. 타인에 의해 한 사람의 생사여부가 결정되고 그조차 정당한 이유 없이 일방적으로 희생당하는 불합리한 상황은 그 자체로 서늘하고 비참하다. 이는 현재 직접적으로 전쟁 상황에 놓인 우크라이나-러시아 국민뿐 아니라, 동시대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질 만한 일이다.


대체 왜 전쟁을 일으키는가

<Paths Of Glory> © United Artists


현실과 똑 닮은 영화 속 상황을 지켜보면서 대체 인간은 왜, 이같이 모두가 파멸하는 전쟁을 일으키는지, 그리고 그러한 역사는 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됐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브뤼셀 자유대학 국제정치학의 조너선 홀스 래그 교수가 쓴 도서 <권력 쟁탈 3,000년: 전쟁과 평화의 세계사>(북트리거, 2020)에서 다소 그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서기전 1000년 경부터 서기 2000년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에서 전쟁과 평화의 역사적 사건을 정리하면서 인류사에서 전쟁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이유와 배경, 그에 대한 대처안을 제시한다. 그가 인용했듯, 미국의 정치인 헨리 키신저는 ‘국제정치의 핵심이 평화와 전쟁’이라고 말한다. 역사상 모든 사회는 인간의 권력욕과 국가와 국가 간 끝없는 경쟁이라는 힘의 논리로 움직였기 때문에 결국 국제정치는 혼돈의 장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서문 제목과 같이 ‘인간은 평화를 꿈꾸지만, 현실은 전쟁의 연속’이라는 말이 뼈아프게 와닿는다.

여기서 보다 파생하여, 역사적으로 전 세계에서 전쟁이 반복되는 이유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꼽는다. 첫째는 지배자의 권력과 야심에 의해, 둘째는 국가 간의 안보적 딜레마에 의해, 셋째로 교역로를 장악함으로써 무역 수익을 독차지하기 위해, 넷째로 종교 간 차이와 대립에 의해서다.

도덕적 우위를 명분으로 내세워 과거의 굴욕과 푸대접을 되갚고 정의를 회복하겠다는 욕구는 역사 내내 대중이 전쟁에 뛰어들게 하는 효과적인 대의였다고 저자는 짚는다. 조약과 정의, 평화와 종교 모두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로 쓰였음도 지적한다. 한편 현실 역사에서 외교의 일차적 목적은 자국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므로 외교적 노력으로만 전쟁을 막아내지는 못한다는 점도 객관적으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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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도시나 국가, 제국에서 ‘전쟁이냐 평화냐를 결정하는 행위자들의 일차적 관심은 언제나 자신의 번영과 안보였다’라는 저자에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때문에 국제 관계의 주역과 관찰자들이 자포자기하거나 환멸에 빠져서는 안 되고, 모두가 권력 균형의 변화로 인한 동요를 해결할 책임을 갖고 있음을 인지하라는 충실한 조언이 마음속 문장으로 새겨졌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3000년 역사를 통해 얻은 교훈을 압축해, 인간의 자연 상태는 무한한 평화가 아니며 자연 상태에서 살아남으려면 최선의 안보로서 권력을 키워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힘이 있으면 타인에게 지배당하지 않는 반면, 힘이 없으면 착취와 결핍과 학대를, 최악의 경우엔 죽음까지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제국적 평화란 착취의 다른 말이었다.

착취는 필연적으로 적개심을, 저항을, 대립을 낳는다.

그러므로 제국 중심부 주민들이 누리는 평화는 변방의 전쟁 때문에 가능한 평화였다.

무력으로 새 영토를 정복하고 침입자를 격퇴하고

이주민을 통제했기에 가능한 평화였다.

- 도서 <권력 쟁탈 3,000년: 전쟁과 평화의 세계사>, p. 520.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Paths Of Glory> © United Artists


전쟁은 돈과 권력의 다른 이름이자, 지배자가 이익을 얻을 기회라고 한다. 지금 저토록 무모하게 전쟁을 벌이는 이웃나라 지도자도 그러한 보상을 기대하며 악화된 상황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일 터. 동시대를 사는 우리도 보다 경각심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저자는 ‘전쟁의 공포가 평화를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평화를 위해 도덕에 기댈 것이 아니라 공포의 기억을 환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진보의 가능성과 퇴보의 위험 모두를 드러내는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새기라고 조언한다.

이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역할에 대해 고찰해본다. 우리 세대는 6.25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니다. 민주화 항쟁도 교과서나 영화로만 접했다. 그러나 미디어를 통해 접한 전쟁과 항쟁의 역사가 우리 세대에 되풀이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제는 세계사를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하고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맞물려 돌아가는 세계정세에 보다 민감해져야 할 때다. 깨어 있는 시민 의식이 필요하다. 자신의 안보와 안위만 생각하는 지도자를 분별하고 각자의 역할을 찾아가야 한다.

깨어 있는 시민으로서 우리는 현세대와 더불어 후대가 역사를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할 의무가 있다. 더불어 전쟁으로 인한 참상이 어떠한지 역사에 비추어 계속 주지하고 자각할 수 있도록 건강한 토론 문화를 적극 열어야 할 것이다.


총사령관 브롤라드: 자네는 이상주의자야.

그리고 난 자네의 그 시골뜨기 같은 고집이 안쓰럽네.

우린 전쟁 중인 걸세. 닥스. 이겨야만 하는 전쟁이지.

그들은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총살을 당한 거야.

자네는 미로 장군에 대해 책임을 물었고 난 그것에 대해 문책했네.

내가 잘못한 게 뭐지?

닥스 대령: 당신이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당신을 동정합니다.


- <Paths Of Glory> 장면 중에서, 총사령관 브롤라드와 닥스 대령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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