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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라희 Oct 30. 2022

[연극] 선과 악, 공존의 의미-반쪼가리 자작

연극 <반쪼가리 자작>

연극으로 다시 만난 그의 세계

연극 <반쪼가리 자작> © 창작조직 성찬파


흰 칠을 한 얼굴에 빨간 볼, 광대 분장을 한 6인의 배우들. 캐릭터명은 따로 정해지지 않았다. 그저 배우 1부터 6까지. 이들은 메다르도 자작이라는 하나의 역할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극적 사건을 겪는 시점에 따라 나누어 연기하기도 한다. 때로는 인형과 그림자들이 극 중 인물이 겪은 사건을 더욱 세밀하게 눈앞에 그려내어 준다. 관객은 아코디언 연주에 홀린 듯 이들이 인도하는 극적 세계에 이른다.

연극 <반쪼가리 자작>은 17세기 테랄바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세상 곱게 자란 청년 메다르도 자작이 터키 전쟁에 참전해 대포에 돌진하는 바람에 몸이 산산조각 나는데, 야전 병원 의사들의 봉합으로 겨우 회복한 뒤 반쪽짜리 몸으로 고향에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몸이 반쪽으로 쪼개지면서 메다르도 자작은 세상을 반쪽만 보게 된다. 그중 ‘악’한 면만 고스란히 남은 그는 테랄바를 통치하면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모든 걸 냉정하게 처단해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반쪽인 ‘선’한 메다르도 자작이 나타나 극한의 선을 베풀면서 마을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악한 메다르도 자작과 선한 메다르도 자작은 동시에 파멜라라는 여인에게 사랑에 빠지고 그녀를 차지하기 위한 결투를 벌이다 두 개의 메다르도가 합일에 이르게 된다.


연극 <반쪼가리 자작> © 창작조직 성찬파


이 작품은 한 편의 환상동화와 같은 작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Il Visconte Dimezzato>(1952)를 원작으로 한다. 이탈로 칼비노는 보르헤스,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더불어 현대 문학 3대 거장으로 손꼽힌다. 특히 이 작품은 냉정하고 잔혹한 현대 사회에서 분열된 인간의 정서를 동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냈다는 평을 받는다.

이 작품을 관람하기로 결정한 건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을 다시금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예전에 독서토론 모임에서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연작을 6회 차에 걸쳐 탐구하기로 했는데, 초현실주의적인 그의 소설적 호흡이 버거워 결국 회차를 접은 적이 있다. 초현실주의는 작품은 작가가 설계하는 세계에 온전히 자신을 맡겨야 하는데, 그러기엔 당시에 스스로 준비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연극 <반쪼가리 자작>의 화려한 수상경력도 선택에 한몫을 했다. 제42회 서울연극제 대상, 연출상, 관객 리뷰단 인기상을 휩쓸었다고 하니, 오랜만에 제대로 연극적인 작품을 볼 수 있겠다 싶어 기대한 바도 있다.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 극장에서 기획초청 공연을 한다는 건 그 자체로 연극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라는 보증이기도 했다.


온전한 혹은 온전치 못한 것의 경계

연극 <반쪼가리 자작> © 창작조직 성찬파


“온전하지 못한 이 두 개의 반쪼가리 자작, 자신의 고향으로…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으로 돌아온, 온전한 메다르도. 그들의 자비와 공포로 온전한 사람들에게.. 근데, 온전하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이지, 난 온전하지 않다는 건가…” 

광대들은 이 같은 독백으로 극을 시작한다. 어찌 보면 주제와도 맞닿은 이야기를 화두에 던짐으로써 ‘온전함’이라는 개념에 대해 관객이 성찰하도록 이끌고 있다. ‘온전함’이라는 사전적 개념에는 ‘본바탕 그대로 고스란하다, 잘못된 것이 없이 바르거나 옳다’라는 뜻이 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온전하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가, 온전함에 담긴 바르고 옳다는 기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완전무결한 온전한 대상이 세상에 있기는 한 것인가.

연극 <반쪼가리 자작>을 보면서 결코 완전하고 온전할 수 없는 인간이 절대적인 존재가 되려 할 때 세상과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비극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꼈다. 절대 악과 절대 선의 기준과 경계는 불분명하고 완전할 수도 없다. 그것에 반함으로써 세상에 불균형을 불러오는 것이다.

작품 속 마을 사람들을 통해 대중의 속내를 들여다보면서 의외라고 느낀 지점이 있다. 한 가지는 악한 메다르도 자작의 통치에 점차 순응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그러했다. 그의 악독함에 치를 떨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입으로만 그를 신봉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입으로나마 악한 메다르도를 신봉하다 보니 마을 사람들은 그러한 통제와 압박에 익숙해져 그걸 오히려 편안하게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선한 메다르도 자작이 나타나 선행을 베풀었을 때, 어색해하고 불편해하며 심지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선과 악 둘로 나뉜 메다르도 자작 중 한쪽만 존재했으면 좋겠다는-심지어 악한 메다르도 자작만 남는 게 낫겠다는- 바람을 내보인다.


연극 <반쪼가리 자작> © 창작조직 성찬파


이를 환경과 조건에 순응한 인간들의 아둔함이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선한 이성보다 악한 본성이 더 강해서 그것에 길들여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 역사의 한 토막이 떠올랐다. 군사독재정권에 반기를 들면서도 점차 그에 익숙해지고 심지어 그의 행위에 동조하는 이들이 생겨났던 대중의 모습이 연상됐다. 이를 환경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한 인간들의 아둔함으로 본다면 여기서 필요한 미덕은 깨어있는 시민의식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선한 메다르도의 주문을 받은 기계 장인의 반응이다. 선한 메다르도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특이한 기계를 주문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밀가루를 빻는 물방아와 빵을 구울 수 있는 오븐, 사람들의 정서를 위해 부드러운 음악을 연주하는 오르간의 기능이 결합된 기계를 제작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장인은 이를 주문대로 만들지 못한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기계가 완성되기 어려운 것처럼 사람들에게 두루 이로운 선함이 존재하기란 어려운 까닭이다. 

선한 메다르도는 그 외에도 마을 사람들을 좋은 의도로 돕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부담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사람들은 그가 종용하듯 권하는 선한 행동을 일상생활에서 모두 행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느꼈다. 종교인들이 설파하는 덕목을 우리가 일상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면 물론 좋겠지만, 무한 경쟁이 가득한 속세의 인간사가 그렇게 정결하게 유지되지만은 않는 것과 같다.

연극 <반쪼가리 자작>에서 선한 메다르도와 악한 메다르도를 대비시킨 배경도 선과 악이 공존할 때 그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갖게 된다는 데에 있다. 두 쪽의 메다르도가 결투 끝에 결국 한 몸으로 합쳐지는 장면에서 이때의 메다르도를 선함과 악함이 뒤섞인 ‘온전한’ 인간이라고 칭한 것도 그 이유였다.


우리는 선악의 결정체

연극 <반쪼가리 자작> © 창작조직 성찬파


악이 존재해야 선이 빛난다. 극작법 중에 악역을 세밀하게 설계해야 선한 역이 보다 입체적이 된다고 한다. 선역이 나아가려는 방향에 악역이 어깃장을 놓으며 갈등을 일으키고 다시 화해하고 진일보를 돕는다. 악역은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희생제물이 될 수도 있다.

우리도 삶 속에서 내가 누군가에게는 악역이기 될 수도 또는 선역이 될 수도 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두쪽의 메다르도가 합일을 이뤄 마침내 온전함을 이루어낸 덕분에 온전함을 얻은 것처럼. 인간의 온전함을 위한 선과 악의 공존이다.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들이 둔감해서 모르고 있는 자신들의 완전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 

나는 완전해. 그리고 내게는 모든 것들이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막연하고 어리석어 보여. 

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건 껍질에 지나지 않았어. 

우연히 네가 반쪽이 된다면 난 너를 축하하겠다. 

얘야, 넌 온전한 두뇌들이 아는 일반적인 지식 외에 사실들을 알게 될 거야. 

너는 너 자신과 세계의 반쪽을 잃어버리겠지만 

나머지 반쪽은 더욱 깊고 값어치 있는 수천 가지 모습이 될 수 있지. 

그리고 너는 모든 것을 반쪽으로 만들고 너의 이미지에 맞춰 파괴해 버리고 싶을 거야. 

아름다움과 지혜와 정당성은 바로 조각난 것들 속에만 있으니까.”

– 중편 소설 <반쪼가리 자작>, 이탈로 칼비노, p.60,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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