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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라희 Dec 08. 2022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 옷자락 질끈 묶고 저승에서

옷자락 질끈 묶고 저승에서 돌아온 당찬 그녀

옷자락 질끈 묶고 저승에서 돌아온 당찬 그녀

국립창극단의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


창극의 새바람을 몰고 오다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 중 극 중 장면 © 국립극장


지난 2014년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가 막을 올렸을 때, 관객들을 비롯해 공연예술계 사람들은 일시에 술렁였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창극의 새로운 형태를 만나게 됐다는 기대감과 기쁨, 즐거움이 뒤섞인 긍정적인 감정이었다. 연일 매진 행렬이 이어지고 ‘기대만큼, 아니 기대보다 더 좋았다’는 관극 평이 잇따랐다.

당시 이 작품은 기대를 모으기에 충분했다. 연출가 고선웅은 천부적인 언어적 감각을 지니고 극작과 연출을 병행하며 극공작소 마방진을 이끌던 연극연출가 출신으로, 재기 발랄하면서도 시사적 무게감 또한 갖춘 작품을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한승석 작창가는 창극에서 소리를 짜는 책임을 맡아 텍스트의 속뜻을 담으면서 말맛을 잘 살려내기로 유명했다. 국악인 출신 배우로 마당놀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낸 김성녀 예술감독은 소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 이들이 모였을 때의 시너지를 가늠해보는 것 또한 재미의 일부였다. 예리하면서도 깊은 소리와 아름다운 외모를 겸비한 소리꾼 이소연은 주인공 옹녀 역에 딱 들어맞았다.

한복 치마를 한쪽으로 질끈 동여매고 물동이를 든 옹녀의 모습, 살짝 비껴서 바라보는 뒷태지만 고혹적인 포스터만으로도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는 관객들과 예술계의 기대를 한껏 드높였다. 그러한 높은 기대감을 감당하기에 작품은 훌륭했다. 이 작품은 탄탄한 스토리텔링과 뛰어난 소리적 구현으로 창극 최초로 차범석희곡상 뮤지컬 극본 부문을 수상하고, 프랑스 초청 공연을 시작으로 해외 유수 공연장에서 한국형 오페라인 창극을 선보였다. 

국립창극단 단원들도 관객들의 사랑에 기뻐하며 창극인으로서의 자긍심이 고취되었다. 고전에서 벗어난 시도에 자칫 비난받을까 두려워했던 마음도 씻어버리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주저함이 없게 되었다. 가늠컨대 창극도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경험을 한 관객들은 이 작품을 통해 한국 음악극의 미래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후로도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는 승승장구했다. ‘격조 높은 18금 핫한 창극’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창극 최초 7년 연속 매진 행렬, 객석 점유율 90%’라는 빛나는 성과를 남겼고, 그 기록은 여전히 매년 수정되고 있다. 


당찬 여성 옹녀가 그려낸 서사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 중 극 중 장면 © 국립극장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는 해외 공연에서는 <마담 옹 Madam Ong>이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알렸다. 원전 변강쇠전의 주인공인 변강쇠가 아닌 옹녀에 방점이 있는 작품임을 강조한 것. 남성 중심적 서사로 풀어간 변강쇠 전이 가진 한계를 넘어, 주어진 운명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여성으로서의 옹녀가 이 시대를 관통할 수 있다는 것을 창작진은 꿰뚫어 보고 있었다.

원전 변강쇠전은 남성 중심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옛 시대적 사고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평안도 월경촌에 사는 옹녀는 열다섯부터 혼례를 올리는 족족 다양한 원인으로 남편과 사별하는 아픔을 겪는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러한 옹녀의 아픔을 감싸주기는커녕 ‘상부살(喪夫煞, 과부가 될 팔자)’이 낀 ‘남편 잡아먹는 년’이라 수군대며 마을에서 그녀를 내쫓기에 이른다. 

옹녀 스스로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정해진 수순이 있는 듯 흘러가는 삶을 되돌려 세운 건 그녀 스스로의 의지였다. 특히 혼령이 된 어머니가 나타나 그녀의 출생의 배경을 말해주는데, 그 또한 시대적 그리고 사회적 약자로서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표본 중 하나다. 마을 청년들에게 겁탈당해 임신을 하게 된 어머니는 가족에게서 버려지고 방치됐다. 아이를 낳으려 마을을 떠나고 이리저리 떠돌며 살다 객사하여 삶을 마감한 비천한 삶이었다.

옹녀는 어렵사리 맞이한 남편 변강쇠 또한 장승을 해한 탓에 동티로 죽으니, 이것이 자신의 상부살 때문이냐며 타파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어머니처럼 숨죽이고 살다 흔적 없이 생을 접지 않겠다며 남편 변강쇠를 저승에서 구해내 오겠다는 선택을 행동으로 옮긴다.


보기 좋으나 장고 끝에 악수라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 중 극 중 장면 © 국립극장


영상으로 박제되는 영화와 달리, 무대를 바탕으로 현장성이 중요한 공연예술 작품은 생물과 같다. 관객의 반응에 따라 대본과 작창이 일부 수정되고 또 다른 캐스팅으로 인해 역할의 느낌이 달라지고 무대 세트가 추가되면 동선이 바뀐다.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 또한 초연 이래 꾸준히 개작을 계속해왔다. 많은 사랑을 받은 좋은 작품일수록 관객들의 요구도 무수히 많아진다. 애정 어린 조언이지만 때로는 창작진의 기획의도를 뒤흔들기도 한다.

국립극장 레퍼토리 시즌 2021년 버전의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는 꾸준한 개작의 결과가 장고 끝에 악수가 된 사례다. 기획 의도이자 작품의 강점이었던 여성 서사가 다소 약해졌다. 특히 후반부 장면을 지나치게 삭제하면서 여성 서사로서 특히 힘을 발휘해야 할 극 지점이 흐릿해졌다. 

극 후반부는 마을 장승을 땔감으로 쓰면서 동티가 나 숨을 거둔 남편 변강쇠를 찾아 저승으로 찾아간 옹녀가 장승신들을 감화시키는 장면이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무너지는 걸 원치 않는 장승신들이 옹녀가 이승으로 돌아갈 방편을 찾다 아기를 잉태하게 하는 것으로 모든 갈등이 한순간에 종결된다.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 중 극 중 장면 © 국립극장


물론 옹녀가 남편 변강쇠 사이에 알토란 같은 자식을 낳아 도란도란 사는 게 소망이었고 그래서 남편 사후 천지신명의 도움으로 얻게 된 아이가 소중하다고는 하지만, 후반부 옹녀의 선택과 그에 따른 결말은 다소 급작스럽다. 변강쇠를 어떻게 해서든 곁에 데려오겠다며 목숨을 내놓고 저승까지 쫓아간 옹녀가 아기가 생겼다는 소식만으로 이전에 소망하던 모든 걸 단박에 포기하고 이승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너무나 급작스러워 관객으로서는 설득되지 않는 것이다. 

옹녀를 필두로 한 진정한 여성 서사라면 그의 행동으로 인해 변강쇠의 교화를 끌어내는 데까지 연결했어야 한다. 이승에서도 노름질을 일삼고 한량에 오입쟁이로 사는 데 익숙한 변강쇠가 옹녀로 인해 깨달음을 얻고 달라진 면모를 보이는 데까지 극이 도달했어야 한다고 본다. 변강쇠 또한 저승에서의 새로운 삶을 기약하고 전환점을 마련하며 끝을 냈어야 한다.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 포스터 © 국립극장


원전에서 미처 해석되지 못했던 옹녀라는 캐릭터에 입체감을 주고 전면에 내세운 패기에 비해, 방향을 잃고 미약해진 결말부에 있어서는 꾸준한 개작이 때로는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장승신들의 저지와 만류에게 불구하고 강단 있게 스스로 선택해 저승에 간 옹녀가 변강쇠의 교화를 끝내 이끌어내지 못하고 새로운 대상인 아기에만 모든 가치를 쏟아붓겠다는 선택이 캐릭터의 일관성과 당위성을 해치고 있다.

초연 때는 원전 변강쇠전에 나오지 않았던 옹녀의 다채로운 모습을 가득 담으려 애쓴 게 보였다. 장장 3시간에 걸쳐 공연을 하면서 작품에 출연한 소리꾼들이나 관객들에게 다소 무리였다. 새로운 시도는 충분히 전달됐지만 공연 시간의 축약에 있어서 개작이 분명 필요해 보였다.

재연 때는 극적 템포나 흐름상 비대한 부분을 덜어내면서 작품이 축약적으로 잘 완성됐다고 보았다. 소리적 구성으로도 좀 더 풍부하게 보완된 부분이 작품의 수준을 높였다. 그렇게 잘 정리되어 국립창극단의 레퍼토리 작품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물론 2022년에 이르는 지금까지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는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왔지만 다음 단계로 이어 나아가려면 초심이 필요해 보인다. 수많은 수정 보완을 거쳐 이르게 된 지금의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가 애초 기획의도에서 벗어나진 않았는지, 금 같은 조언들이 모여 독으로 쏘아진 건 아닌지 살펴야 한다. 이 작품을 출발하게 한 기획의도와 캐릭터 구성으로 다시금 돌아가 전반적으로 점검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레퍼토리작으로 오래 함께하기 위한 제언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 중 극 중 장면 © 국립극장


한국 공연예술을 사랑하는 관객으로서 국립창극단의 가치와 매력이 보다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창극단은 창설된 배경과 지나온 시간만큼 상징성이 있다. 나아가 미래 한국 공연예술계를 이끌어갈 후대 예술인들에게 하나의 지평선이자 기준선이 되는 예술 단체다. 현재의 행보가 미래를 구상하는 발판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번 원고를 통해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가 국립창극단의 대표작이자 레퍼토리 작품으로써 오래도록 사랑받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미래를 향한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초연 때 보다 강력했던 여성 서사를 다시금 보강하면 좋겠다. 그것이 원전 ‘변강쇠전’이 아닌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이 확연히 갖는 차별점이다. 

다음으로 현재 작품상 1인 또는 합창 위주의 작창도 보다 풍성한 음악적 결로 손볼 필요가 있다. 현대 뮤지컬이나 오페라 등도 다양한 화성과 화음을 구사함으로써 풍성해진다. 1인 판소리에서 출발해 무대화한 창극이 노래하는 ‘창’으로서의 정체성을 보다 구체화하려면 음악적 다양성을 포괄할 필요가 분명 있다.

또한 무대상의 움직임도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캐릭터상 장승신이어서 손발이 묶여 움직임에 제약이 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좀 더 창의적으로 구상해보면 좋은 움직임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무대 세트 또한 노란색의 긴 상자들을 다양하게 배치하는 현재의 무대 구성도 연극적이지만, 현대 무대예술에서 영상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차용하는 시도도 작품의 지속성을 위해 권장하고 싶다.

이와 같이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가 그동안 수많은 조언을 토대로 변화하고 발전해왔지만 그 본질은 계속되기를 바라며, 국립창극단의 자랑스러운 레퍼토리작으로 오래도록 우리 곁에 남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 중 극 중 장면 ©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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