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앱스트랙트-디자인의 미학> : 의상 디자이너
장인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
(사진) Ruth E. Carter, <Abstract: The Art of Design> © Netflix
빛나는 성과를 이뤘을 때, 우리는 그가 쌓아온 지난한 과정까지 이미 파악했다고 여긴다. 그건 어쩌면 결과물의 달콤함이 주는 기쁨에 취해 과정의 쓴맛은 굳이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누군가의 인생을 통해 느껴본 달콤쌉쌀한 맛의 오묘한 매력은 그 가치가 더욱 높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이지만 그 안에 한 인물의 달콤쌉쌀한 삶의 맛이 오롯이 담겼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앱스트랙트-디자인의 미학>. 가상의 시공간을 그려내기 위해 현실의 시공간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 각 분야 예술가들의 삶을 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을 만났다. 6개 분야 디자이너들 - 현대 미술 올라푸르 엘리아손, 건축 네리 옥스만, 의상 루스 카터, 장난감 캐스 홀먼, 디지털 UX 이언 스폴터, 글자체 조너선 헤플러가 그들이다.
이들은 그야말로 ‘장인’이라 칭할 수 있다. 사전적 의미로 장인(匠人)은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동시에 예술가의 창작 활동이 심혈을 기울여 물건을 만드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예술가를 두루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이 해당 분야에서 그간 쌓아온 예술적 업적, 기술적 성취, 그로 인한 해당 분야의 발전 등을 아울러 그러한 칭호를 붙이기에 정당하다고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다.
(사진) <Abstract: The Art of Design> © Netflix
모든 편이 인상적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영화의상 디자이너 루스 카터(Ruth E. Carter, 1960년 4월 10일~) 편은 내게 다양한 생각 거리를 주었다. 루스 카터라는 20년 앞서 산 인생 선배가 조곤조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느낌이었다. <앱스트랙트-디자인의 미학: 루스 카터 편>은 의상 디자이너의 직업적 세계에 대해 알게 된 다큐멘터리였을 뿐만 아니라, 루스 카터가 지향하는 예술 세계를 비롯해, 삶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입장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결국 그를 존경하게 된 작품이기도 했다.
도서 <장인의 탄생>을 쓴 장원섭 저자는 현대적 장인의 8가지 특성을 제시한 바 있다. 성장에 대한 의지를 가진 자, 지독한 학습자, 일의 해방자, 창조적으로 일하는 자, 배움을 넓히는 자, 배움을 베푸는 자, 정상에 오른 자, 고원에 사는 자가 그것이다. 다큐멘터리 시리즈 <앱스트랙트-디자인의 미학>를 통해 본 의상 디자이너 루스 카터는 저자가 제시한 현대적 장인의 8가지 특성을 모두 갖춘 사람이었다. 자신의 삶을 해당 분야에 온전히 일치시켰기에 그만한 성취를 이루고 마침내 현대적 장인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으리라.
루스 카터, 스스로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사람
(사진) Ruth E. Carter © QUANTRELL D. COLBERT / harpersbazaar
<앱스트랙트-디자인의 미학: 루스 카터 편>은 루스 카터가 이뤄온 성과에 앞서 의상 디자이너로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대해 먼저 이야기한다. 패션이 좋아서 이 일을 시작한 게 아니었고, 자신은 단순히 옷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는 스스로를 ‘자신은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고 캐릭터가 살아온 삶을 의상에 담아내는 ‘스토리텔링을 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제작한 의상을 입은 배우가 이리저리 표정을 짓고 포즈를 취하면서 자신이 맡은 역할에 빠져들어가는 모습을 볼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는 그는 이야기꾼이자 천상 의상 디자이너였다.
그러한 정의에 이르기까지 오랜 고민과 관찰이 있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일을 그만의 관점으로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고 본다. 내게도 그렇게 숙성된 관점에서 내린 나에 대한 그리고 내 일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작품을 만들 때 처음 하는 일은 꼼꼼한 대본 분석이었다. 형광펜으로 밑줄을 쳐가며 떠오르는 아이디어와 질문 사항을 적어두고 다른 분야 스태프는 어떻게 구상하고 있을지를 가늠하면서 집중해서 대본을 읽고 상상하는 과정이었다. 자신의 역할은 이야기를 시각화하는 것이므로 적절한 질감과 색채를 찾아 이야기 속에 녹여낼 방법을 찾는다고 말했다.
인터뷰 영상을 보고 그가 자신의 일과 직업을 대하는 출발선상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 의상을 기술적으로 다루고 그 분야만 한정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 스태프와 함께 영화적 세계관과 시공간을 건설하는 입장에서 보다 넓고 깊게 작품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게 했다.
(사진) Ruth E. Carter © ADAM AMENGUAL / townandcountrymag
루스 카터가 스파이크 리 감독과 작업한 <말콤 X> 의 작업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가 얼마나 ‘지독한 학습자’이자 ‘성장에 대한 의지를 가진 자’이며, ‘창조적으로 일하는 자’인지 알 수 있다. 그는 교정국에 직접 연락해 말콤X에 관한 수감 당시의 자료를 요청했다. 교정국에서 전달받은 범인 식별용 사진부터 의료 기록, 말콤이 쓴 편지 등을 면밀히 살펴보고 수감 전후의 인물 변화를 찾아냈다.
또한 40년대 뉴욕을 공부하고 할렘의 활기 넘치는 분위기를 어떻게 표현해낼지 고민했다. 그 결과 루스 카터는 거만에 빠져 살던 예전의 불량배에서 수감 후 독학을 해 지적이고 겸손해진 말콤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자신보다 큰 사이즈의 주름진 정장을 입은 모습으로 표현해냈다.
그는 단순히 직감에만 의존해 의상을 만드는 게 아니라, 시대적 인물적 자료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상상력을 더해 시각화함으로써, 의상을 입은 캐릭터를 넘어 살아 숨쉬는 대상으로 만들어냈다. 그러한 측면에서 루스 카터는 일 자체에서 재미와 보람을 찾고 성장하며 자신의 일에서 새로운 지평을 만들어낸 인물이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일의 해방자’로서의 현대적 장인이다.
사회적 맥락 속 나, 예술과 맞닿은
(사진) <Black Panther>(2018) © Marvel Studios
루스 카터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우선시하고 인문학적인 공부를 중요하게 바라본다는 점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렇기에 루스 카터의 의상이 곧 수많은 메시지를 담은, 고유의 작품이 되는 경지에 가닿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늦깎이로 심리학을 공부한 엄마의 영향을 받아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를 깊이 고민하면서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길렀다. 또한 고등학교 시절부터 스프링필드 매사추세츠 중앙도서관에 가서 노예에 관한 책이나 시민권에 관한 책을 읽으며 인문학적 시각을 넓혔다. 더불어 아이디어를 찾을 때는 자료만 뒤적이지 않고 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눈으로 관찰하며 그가 살아온 삶의 여정을 상상하고 영화적 캐릭터로 담아낼 시각적 요소를 찾아냈다.
이렇듯 일상 속 습관으로도 한 인간에 대한 몰입된 이해와 마음을 쏟은 공감이 있었기에, 루스 카터가 만든 의상에는 영화 속 거대한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캐릭터들의 의상에 그 인물만의 역사와 배경, 스토리가 녹여져 있다. 그러한 선상에서 루스 카터가 작업한 <블랙 팬서> 속 와칸다 전사들의 전투복에는 각 지역에서 모여든 전사들의 가문적 배경과 신분, 성향 등이 디자인적으로도 다르게 표현됐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고대 아프리카의 토착 부족을 연구해 판타지와 퓨처리즘이 들어간 슈퍼히어로물 <블랙 팬서>는 루스 카터에게 아카데미 최고 의상 디자이너 수상의 기쁨을 안겨줌과 동시에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수상자라는 영예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기쁨과 영예는 단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루스 카터가 속한 사회적 맥락에서의 성취이기도 하다. 루스 카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역할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흑백영화 시대부터 흑인은 부정적이고 편협한 시각으로만 그려졌기에 자신을 비롯한 현 세대는 그러한 편견을 바꾸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걸 말이다.
그러한 책임감을 바탕으로 스파이크 리 감독과 작업한 <말콤 X>,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아미스타드>, 라이언 쿠글러 감독과 함께한 <블랙 팬서>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예술 작품으로서의 의상 디자인을 통해 주변부에서 맴돌던 흑인에 대한 관점을 중심부로 옮겨놓았다. 편견의 시각으로 본 흑인의 삶이 아닌 인간 자체로서의 흑인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선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의상 디자이너로서 루스 카터는 예술적 성취를 이뤘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서 예술을 통
한 자신의 역할 또한 인식하고 실천했다. 그렇기에 그는 정상에 오른 자이자 고원에 사는 자로서
현대적 장인의 개념에서 ‘추앙’받을 법하다.
내게는 또 하나의 도전
(사진) Ruth E. Carter © arthistory
자신의 일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재미 아닐까. 자신의 전문성을 갖춘 이들이 하나의 지향점을 갖고 각 분야별로 연계되어 일할 때 오는 시너지는 진정 아름답다.
루스 카터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그의 직업적 자세와 작업 방식에 좋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현대적 장인으로서 일컬어져야 할 여러 가지 이유를 짚어보면서 나 또한 내 일에서의 장인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요건과 자격에 대해 생각했다. 성장에 대한 의지를 가진, 지독한 학습자이며, 배움을 넓히고 창조적으로 일하는 자의 요건에는 얼추 부합하는 듯하다. 그러나 배움을 베풀고 정상에 올라 고원에 사는, 일의 해방자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진행 중이라고 하자.
내 인생에서 현 시점은 과도기다. 커리어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직무, 산업, 직장이라는 분류로 볼 때, 같은 선상이지만 각 요소별 변화가 있었다. 플랫폼 비즈니스의 특성에 대해 파악하는 단계이고 더불어 스타트업의 특수성도 알아가고 있다. 커리어 코치는 내게 스스로 큰 도전을 택한 것이고 용기 있는 행보라며 북돋워줬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환경을 뒤로 하고 새로운 환경을 택해 발을 내딛었으니, 그 환경에만 속했던 이들과는 또 다른 경험을 얻게 될 것이라 했다.
그중 ‘새로운 도전’이라는 말에 난 이끌렸다. 그건 내가 살아온 삶을 나타내는 키워드였다. 늘 새로움에 목말라하고 직접 부딪혀보고 싶어하고 몸으로 느끼고 싶어하는 나를 아우르는 단어였다. 아, WHY를 잊고 WHAT과 HOW만 생각하고 있었구나. 이 행보는 내 커리어 인생 2막을 열기 위한 선택이었지. 되짚었다.
루스 카터의 탐구 정신을 더 깊이 배워야겠다. 나 또한 자료를 공부하고 시대적 철학을 탐구하면서 깊이와 의미를 갖고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일회성으로 휘발되는 콘텐츠 생산자가 아니라, 어떠한 대상과 독자를 연결 지어 화두를 제시하는 역할을 맡고자 한다. 나의 일이 세상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떤 측면에 기여할 수 있을지 다시금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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