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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라희 Apr 15. 2024

마침내 하늘로 날아오른 소방서

- 자하 하디드, 독일 바일 암 라인 <비트라 소방서>, 1993년

종이를 벗어나 날아오르다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힘차게 날아오르는 새의 날개를 보았다. 푸드덕푸드덕 날아올라 하중을 공중에 가볍게 올려놓고 날개를 쫙 펼친 채 바람을 가르며 하늘을 누빈다. 좁은 틈마저도 몸을 최대한 기울여 날렵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민첩함이 돋보인다. 날카로운 각도로 날을 세운 건물의 처마는 존재감을 뽐냈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회색빛 콘크리트 외벽은 한 마리 새의 체온을 느끼게 한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작품, 비트라 소방서는 그렇게 날아오른 새의 형상을 닮았다.


비트라 캠퍼스Vitra Campus의 건축 투어가 시작됐다. 분홍빛 꽃무늬 셔츠를 입은 멋쟁이 할머니가 가이드로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비트라는 세계적인 스위스 가구 회사이고, 비트라 캠퍼스는 이들의 공장 부지인 동시에 창고이자, 쇼룸이며 건축 미술관이기도 하다. 여행 책자에서 비트라 캠퍼스에 건축물을 세운 건축가들의 이름을 읽고 여긴 꼭 가봐야겠다고 별표를 쳤던 곳이었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는 우주선을 닮은 건축물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로 유명하다. 건축을 맡은 당시 여성 최초 프리츠커상을 받은 스타 건축가의 작품이 한국에도 세워진다며 대서특필됐다. 그러한 그도 세계의 주목을 받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디어가 뛰어나긴 하지만, 구상한 건축물이 현실이 아니라 종이 도면에만 존재한다며 이른바 ‘페이퍼 아키텍트Paper architect’로 조롱받기 일쑤였다. 남성 중심의 건축계에서 여성이자 이라크 출신 아랍인으로서, 곡선 중심의 독특한 건축물을 디자인하는 그가 실력을 인정받기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느끼는 유리벽, 제3국 외국인 신분의 한계, 구상과 실현의 간극에서 나와의 공통점을 찾았을까. 비트라 소방서는 자하 하디드가 페이퍼 아키텍트의 꼬리표를 떼버리고 도면을 벗어나 눈앞에 실현한 첫 번째 건축 작품이라, 내게도 큰 의미로 다가왔다.


건축물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살펴본다. 곡선 형태인 DDP와 달리 비트라 소방서는 예리한 직선이 강하다. 이탈리아 로마 여행에서 본 자하 하디드의 작품 ‘막시-국립21세기미술관MAXXI-National Museum of 21st Century Art’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비트라 소방서는 초기 건축 작품이라 경향이 점차 달라진 듯하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나이를 먹고 깊이를 더해갈수록 자신의 색을 찾아가는가 보다.


콘크리트 벽은 비스듬하게 창에 기댄 듯 세워져 있다. 한 면은 직사각 유리 통창으로 채워졌는데 전체 모양은 사각형도, 사다리꼴도 아니다. 비트라 ‘소방서’라고 했는데, 한국에서 이런 형태의 소방서 건물은 본 적이 없다. 이렇게 외관만으로도 긴장감 넘치는 소방서라니. 


안으로 들어서니 바닥에 라인이 그려진 넓은 공간이 나왔다. 사다리꼴에 ‘가까운’ 유리 통창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소방차 전용 주차장이다. 천정 주광등이 드문드문 있어 어두운 편이고, 덕분에 빛과 어둠의 대비로 공간이 더 깊고 넓어 보였다. 주차장 출구 벽은 쪼개져 천정에 매달려 있다. 출동 신호가 오면 벽면은 마치 영화 속 우주 기지처럼 위로 들려 올라갈 것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소방관들이 활용하는 탈의실 옷장부터 샤워실 가벽까지, 모든 벽면은 10도쯤 기울어져 있다. 분명 바로 서 있는데 왠지 옆으로 쓰러질 듯한 묘한 기분. 그중 칸칸이 나누어진 공간에 불투명한 유리문으로 닫힌 안쪽은 화장실이다. 방문객 중 유럽인 젊은 남자가 화장실 칸에 들어갔다가 어지럽다며 연신 ‘오 마이 갓’을 외쳤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근무한 소방관들이 두통과 구토를 호소하며 소방서 건물에 대한 불만을 호소했다고. 그의 곤혹스러운 표정에 함께 웃었다.


2층을 향한 계단을 오른다. 한쪽 끝만 고정된 외팔보 방식의 계단인데, 밟으니 탄성이 느껴진다. 오르내릴 때 무릎을 보호하기 위해서일까. 긴 테이블과 의자, 간단한 개수대가 놓여진 2층 공간은 식당 겸 회의실로 쓸 법하다. 천정과 벽면 선반의 매립 등에서 노란빛이 배어 나오는데, 사선 구도로 배치됐다. 하물며 짜 넣은 찬장도 훅 잘라낸 사선이다. 여기에 엿가락을 구부려 툭 끊어놓은 듯한 검정색 의자가 객기를 부린다. 건축물의 콘셉트에 맞게 건축가가 가구까지 디자인한다고 하니, 이 또한 자하 하디드의 손길이 담겼을 것이다.


더 나아가면 옥상 테라스가 있다. 이곳도 바닥이 슬쩍 기울어져 있다. 이쯤 되니 비트라 소방서만 중력의 힘과 시간의 흐름이 다르게 적용되는 것만 같다. 사소한 것조차 건축가의 의도일 텐데, 소방서를 이렇게 설계한 이유가 무엇일까. 화재 경보가 울리면 쏜살같이 날아가 불을 끄겠다는 의지일까, 소방관은 언제든 경각심을 갖고 임하라는 의미일까.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건축물로써 또 다른 시공간을 구축하고 경험을 통한 메시지를 주려 했던 점은 분명해 보인다.     



수없이 변화하며 마침내 찾아낸

대학 선배가 ‘영화 현장에서 여자는, 꽃이다’ 라고 했다. 난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대학 졸업 후 상업 영화계에서 연출부 스태프로 일하면서 꼭두새벽에 현장으로 달려가고 밤샘 촬영을 이어갔다. 선배의 말을 곱씹으면서 이를 악물고 버텼다. 시나리오를 고치고 배우들 의상도 챙기며 현장을 뛰어다녔다.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스크립트 수천 장을 펼쳐 보며 편집실을 지켰다. 기뻤고 또한 슬펐다. 응급실에 실려가 링거를 맞으며 결국 한계를 받아들였다. 너무나 졸리고 배가 고팠다. 


한계를 넘어선 여성, 그 말에 담긴 눈물과 고통을 사람들은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 자하 하디드는 해냈고 난 물러섰다. 같은 여성으로서 그녀를 우러러보는 한편, 뾰로통해져 외면하고픈 싶은 마음이 엇갈린다. 스스로 실패자로 느껴질까 봐 두려워서.


자하 하디드는 “아웃사이더로서 힘든 싸움을 지속해나가는 것이 나를 더 나은 건축가로 만들었다, 아웃사이더로 살기에 실험과 혁신을 계속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자신을 무너뜨리려는 그 모든 것에 굳건히 맞서 마침내 해내기 위해 갖은 모욕과 상처를 수없이 삼켜야 했을 텐데. 그는 기꺼이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걸 삶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그와 달리 어쩌면 난, 약점을 감추려 안간힘을 쓰며 버티다 결국에 부러졌나 보다.


페이퍼 아키텍트가 마침내 하늘로 날아오르는 소방서를 눈앞에 지어내기까지, 날카롭게 창공을 가른 그 새가 다시금 바람에 펄럭이는 비단 치마가 되었다가 또한 부드럽고 따뜻한 물방울의 형태가 되기까지. 자하 하디드는 그렇게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다독이면서 변화해왔구나.


먼지 쌓인 졸업 앨범을 펼쳐 보듯 난 가끔 그때의 기억을 돌아본다. 치열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조금만 더 억척같이 할 걸 그랬나. 그래도 미워하거나 서운해하진 말자.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모두 나 자신이니까. 자하 하디드가 건축물을 통해 수없이 자신을 변화시키며 자신의 색을 찾아갔듯이, 매일 매순간 또 다른 나를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이며 나도 마침내 나만의 색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미지는 아래 링크에 올려두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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