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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라희 Apr 20. 2024

우리는 그렇게 하나의 풍경이 된다

- 페터 춤토르, 스위스 숨비츠 <성 베네딕트 예배당>, 1988년

은은한 존재감으로성 베네딕트 예배당

“페터.. 뭐라고 했더라?! 이름이?”

 숙소에서 짐을 싸들고 내려와 차에 싣는데, 일행은 드디어 페터 춤토르의 작품을 보는 날이라며 저마다 들뜬 모습이었다. 영어식으로 읽으면 피터 줌터, 한 나라 안에서 세 개 언어를 쓰는 스위스의 방식대로 읽으면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 그 이름을 들어본 것 같긴 하다. 사진으로 슥슥 넘기며 봤던 그의 작품이 얼른 기억나진 않았다. 아직은 내게 생소한 이름이었다.


 평화롭기 그지없었던 생 모리츠의 풍경을 뒤로 하고 길을 떠났다. 두 시간여를 달려 숨비츠Sumvitg라 불리는 산악 마을에 도착했다. 장대한 산세를 끼고 굽이굽이 들어앉은 마을에 표지판 하나를 세운 버스 정류장이 있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오면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이곳에 도착하겠구나. 근처에 차를 대고 회색빛 잔돌이 깔린 언덕길로 올랐다.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오는 선을 따라 갈색빛 통나무집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있다. 하단부는 하얗게 회칠을 하고 상단부는 통나무로 벽을 채우고 창을 낸 농가주택이다. 창틀에 걸어둔 꽃 화분이 앙증맞다. 언덕 중턱에는 소 한 마리가 무심하게 풀을 뜯어 먹고 있다. 싱그러운 풀내음이 콧속을 파고든다.


 산 중턱에 이르자, 통나무색 몸체에 양철 지붕을 얹은 육중한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 베네딕트 예배당Saint Benedic Chapel은 숨비츠 마을을 굽어보는 듯 언덕배기에 자리해 은은하게 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지붕은 특이하게도 나뭇잎 모양이었다. 산 쪽으로는 끝이 뾰족하고 마을 쪽으로는 둥그스름했다. 통나무색 몸체에는 나무를 얇게 저민 작은 판이 물고기의 비늘처럼 촘촘히 붙어 있었다. 외벽면의 얇은 나무판은 살짝 그을려 까뭇까뭇한데 햇빛을 받고서 다채로운 갈색을 띠었다. 반대쪽은 잔돌의 회색빛을 띠어 오묘하다. 그 곁에는 사다리 형태의 긴 탑에 종 두 개가 달린 소박한 종탑이 서 있다. 종 두 개의 크기나 모양이 달라 소리 또한 다를 것 같았다. 종소리가 나지막이 이 마을을 울리면 어떤 느낌일까. 놀이터에 나가 놀던 아이를 엄마가 부르듯 반갑고 정답지 않을까 상상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성 베네딕트 예배당을 올려다본다. 나무 작대기 두 개를 교차해놓은 듯 그 어떤 장식 없이 간결하고 작은 십자가가 지붕에 꽂혀 있다. 지붕 바로 아래에는 세로로 긴 창이 나뭇잎 모양의 지붕을 가지런히 감쌌다. 뾰족한 지붕 끝을 올려다보니 왠지 뱃머리 같기도 하다. 산꼭대기를 향해 오르는 배라면, 건축가는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를 연상하고 만든 것일까. 몰래 감춰둔 쪽지를 보물찾기하듯, 건축가가 이곳에 심어둔 메시지를 읽어보려 했다. 


 성 베네딕트 예배당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옆에서 바라보니, 눈이 오면 발이 푹 파묻히듯 산줄기를 따라 반쯤 파묻힌 형태로 건축물이 서 있다. 푸르른 알프스 산에 오랜 시간 심어져 있던 나무 한 그루 마냥, 그 자체로 풍경이 되어버린 건축물이었다.     



본질에 집중하니 전체가 보인다

 이제 성 베네딕트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네모반듯하게 착착 놓여진 계단이 매끄러웠다. 계단 옆 손잡이도 지붕 위 간결했던 십자가만큼이나 철근을 툭툭 꺾어 세운 듯 단순했다. 성 베네딕트 예배당의 문은 나무의 결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전통 가옥의 문살처럼 밝은색의 나무를 세로로 나열해 틈새를 두고 붙인 형태였다. 쬐그만 열쇠구멍이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쉬이 허락해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입을 앙다물고 문을 연다. 득득득. 나무문이 은밀하게 내부를 보여주듯 소리를 냈다. 안을 들여다보고 아, 가벼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지붕 아래 가지런히 둘러쌌던 창문에서 안쪽으로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내벽을 둥그스름하게 둘러싸고 세워진 기둥들에서 피톤치드의 나무 향이 훅 밀려드는 것 같았다.


 중앙에는 깨끗하게 마름질해서 툭툭 못질만 한 듯한 나무 의자가 예닐곱 줄 놓였다. 나무의 속살같이 하얀색에 가까운 나무 의자는 창에서 쏟아져 내린 빛을 즐기고 있었다. 단상조차 그다지 높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철저히 장식을 거둬내고 온전한 나무 자체로 나무 의자 앞에 비슷한 높이로 놓여졌다. 단상 위 단순한 교차선으로 나타낸 십자가에 시선이 모아졌다. 곁에는 작은 액자 형태로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놓여 있었다. 천정에 매단 등이나 바닥에 놓은 촛대도 그 자리에 묻힌 듯 숨 쉬고 있었다. 공간에서 갖은 치장이나 위압감을 걷어낸 겸손함이 느껴졌다. 문득 깨달았다. 종교에서 중요한 건 결국 신과 나와의 대화였지. 신성한 대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모든 허례허식을 접어두고 본질에 집중하게 한 건축가의 선택에 박수를 보냈다.


 고개를 들어 천정을 보았다. 보다 선명한 형태로 나뭇잎 모양의 뼈대가 눈에 들어왔다. 빗살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딱딱 맞는 각도로 천정을 떠받들고 있었다. 뾰족한 방향을 따라 위로 나아갈 것만 같은 느낌, 바깥에서 본 형태는 뱃머리가 맞나 보구나. 그럼 지금 우리는 배 하단부를 머리에 이고 서 있는 거구나. 순간 중력이 역행되고 시공간이 뒤바뀐다. 거친 파도가 밀려와도 넘실넘실 타 넘어갈 것 같은 나무배 한 척, 그 배 안에 탄 우리. 그렇다, 우리는 한 배를 탄 것이었다.


 성 베네딕트 예배당을 둘러보는 동안, 외국인 남녀 두 사람이 줄자를 꺼내 내부 이곳저곳의 치수를 재고 진지하게 의논하고 있었다. 한눈에 건축 분야 관계자다 싶었다. 아까부터 든 궁금증이 있었다. 콘크리트와 달리 나무는 습기를 머금어 수축과 팽창을 하면서 뒤틀어지게 마련인데, 산 중턱에 나무로 지어진 이 건축물이 1988년 지어진 이래 35년간 형태의 변형 없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이때다 싶었다. 현장에서 건축 관계자에게 물어봐야지. 그들은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도 친절하게 답을 해주었다.


“… 여기 기둥에 쇠심을 박아서 외벽과 완전히 밀착시키지 않았어요. 틈새를 두었기 때문에 나무가 수축과 팽창을 해도 영향을 받지 않죠. 여기, 바닥도 마찬가지로 기둥과 붙이지 않고 요만큼의 틈새를 두고 둘러싸여 있죠. 여기 들어올 때 계단이 있죠? 그 선 아래로 빈 공간이 있어요. 지면과 직접 닿지 않아서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로부터 거리를 둘 수가 있죠. 그리고 뜨거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잖아요? 저기, 지붕 아래 창이 있어서 위로 올라간 뜨거운 공기는 바깥으로 내보내지게 돼요….”


 이들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온 건축가 부부였다. 베아트리즈와 까를로스 부부는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출강해 학생들도 가르친다고 했다. 건축가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의 작품을 보러 스위스로 함께 여행을 왔다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함께 탐구해가는 이들 부부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들이 성 베네딕트 예배당 구석구석을 일일이 손으로 가르치며 설명해준 덕분에 건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베아트리즈는 내게 페터 춤토르의 또 다른 작품 ‘발스 스파Vals Therme’를 가봤느냐고 물었다. 이곳 다음 코스로 들를 곳이 거기라고 답하자, 그녀는 발스 스파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감탄의 표현을 쏟아냈다. 어제 그곳에서 묵으며 찬찬히 들여다봤는데 완벽한 디테일에 심장이 뛰었다고 했다.


 떠날 시간이 됐다. 페터 춤토르의 명작이라며 건축가인 그들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발스 스파는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기대와 설렘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아, 이래서 페터 춤토르를 건축가들이 사랑하는 건축가라고 했던 건가. 이들이 저 먼 타국에서 그의 건축 작품을 보기 위해 굽이굽이 들어선 알프스 산골짜기를 찾아올 만큼 영감을 주기 때문에. 어쩌면 나와 같이 건축에 대한 선망이 있을 뿐인 이들조차 일깨움을 줄 만큼 깊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성 베네딕트 예배당은 한 컷의 선명한 풍경 사진으로 내 마음 속에 들어왔다. 스위스 숨비츠 마을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건축물이자, 그걸 바라보는 스페인 건축가 부부의 뒷모습과 그들을 한데 바라보는 내가 담긴 사진 한 컷으로 남았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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