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금오름을 곁에 둔 마을, 초록빛 산과 붉은 갈색 빛 흙이 그림 같이 어우러진 곳에 은근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축물이 있다. 구멍이 송송 뚫린 돌담이 주변을 쪼르르 타고 돌며 하얀 몸체의 존재감을 더욱 빛낸다. 금오름보다 몸을 낮추었으나 북서쪽의 비양도를 함께 바라보고 선 이 하얀 건축물은 제주 자연의 색을 가만히 담아낸 백자와 같이 소담스럽다. 건축가 승효상은 이곳을 '하얀 언덕'이 진을 친 곳이라는 뜻으로 '백파진 白坡鎭' 이라 이름 붙였다.
이곳은 근처 제주 이시돌 목장에서 공급받은 원유로 유제품을 생산하는 유가공 공장 '미스터 밀크'다. 유가공 공장 '미스터 밀크'는 제주의 자연이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한림읍에 위치하며 마을과 사람들을 잇고, 제주 사람들의 삶을 잇는다. 성 이시돌 목장에서 길러지는 젖소는 제주 자연을 온몸으로 느끼며 자란다. 이들에게서 얻은 건강한 우유는 미스터 밀크에서 가공되어 각종 유기농 치즈와 원유로 전국 각지로 전달된다. 제주의 자연과 생명, 인간이 한데 어우러진 삶의 순환이 여기서 확인된다.
그러고 보니 건축물의 하얀색 외관은 우유의 흰색를 연상케 하고 반원형 몸체를 둘러싸고 흐르는 듯한 곡선은 힘차게 쏟아지는 우유의 포물선을 닮았다. 넓은 통창의 연결과 얇은 난간이 둘러싼 때문인지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여객선을 떠오르게도 한다. 요모조모 들여다 볼수록 새로운 매력이 찾아지는 건축물이다.
백파진이라 불리는 미스터 밀크 유가공 공장은 크게 2개 덩어리로 나누어진다. 존재 목적에 맞게 유제품 생산과 가공을 위한 설비가 있는 공장동과 이곳을 찾는 이들을 배려한 전망동이 그것이다. 이 두 개의 동은 보행다리로 연결되어 서로의 존재를 인지한다. 공장동에서 시원하게 빼다놓은 보행다리는 제주의 시간을 감각하게 해준다.
연구소가 겸해진 공장동은 위생과 보안으로 외부에 통제되지만, 제주 바다를 내다볼 수 있는 전망동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사다리꼴 모양의 전망동은 완만한 계단으로도 트인 시야의 선사해준다. 이곳을 찾은 관람객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전망동에 올라 저 너머 제주 바다의 심경을 읽는다. 공장동은 타원형 몸체를 통창이 둘러싸여져 있어 채광이 좋다. 통창을 통해 제주의 자연이 한눈에 들어오니 서로의 공간이 연결되고 오가는 느낌을 준다. 그렇게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포용한다.
건축가 승효상은 저서 <빈자의 미학>을 통해 ‘가짐보다는 쓰임이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한 철학의 연장선상에서 파주출판단지의 도시 설계를 맡았고 공동체로서 마을의 회복을 추구했다. 출판인들이 꿈꾸는 미래를 듣고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진 건축가들을 불러 모아 새로운 방향으로 접근한 도시 설계로 문화를 꽃피웠다.
제주 한림읍에 위치한 미스터 밀크 유가공 공장의 설계를 맡은 것 또한 그가 추구한 공동체적 건축 철학을 실천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백파진이라 이름 지은 미스터 밀크 유가공 공장이 성 이시돌 목장과 더불어 제주 한림읍 마을에 공동체적 삶의 계기이자 구심점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