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집 <헤어질 결심>
요즘엔 대본집 읽어
서점에 들르면 베스트셀러 가판대를 한 번씩 쭉 둘러본다. 최근 발행된 책 중에서 영화 <헤어질 결심>의 ‘대본집’이 계속 상위권에 자리해 있었다. 대본집 <그해 여름은>, <나의 아저씨>, <갯마을 차차차> 등의 열풍에 뒤이어 이어지는 베스트셀러의 향연이다. 영상으로 제작된 영화는 감독의 연출적 기량이 작품의 흥행을 좌우하지만, 이미 촬영부터 상영까지 다 마친 시나리오를 ‘돈 주고’ 사볼 때에는 순전히 ‘말 맛’과 ‘플롯’의 재미가 있어서다.
사실 출판물로 나온 드라마 대본이나 영화 시나리오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수 마니아층에서나 찾는 책이었다. 나처럼 예술학 전공한 이들의 책장에나 희곡과 드라마 대본, 시나리오 몇 권 정도 꽂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일반 관객도 굿즈의 개념으로 대본집을 많이 사간다고 한다. 좋아하는 작품이라 물성이 있는 책으로 갖고 싶어서, 자신이 사랑하는 배우가 출연한 작품이어서, 그가 활자를 어떻게 연기했는지 느껴보고 싶어서, 대본에서 수정되어 최종적으로 어떤 장면을 비교해보고 싶어서 대본집을 사 간다고.
최근 커뮤니티 플랫폼에 올라온 <영화 ‘헤어질 결심’의 대본집 낭독 모임>의 후기를 읽었다. 우선 각자 낭독하고 싶은 부분을 공유하고, 공간을 대관해 총 6개 파트를 남녀 짝을 지어 낭독하는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아니어서 민망하지는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후기에 따르면 다들 진지하게 임해서 걱정이 무색했다며, 커뮤니티 리더는 다음에 다른 각본집으로 모임을 열어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요즘엔 이런 모임도 흥미를 갖고 모이는구나 싶어 흥미로웠다. 6명이 모였고, 역할을 나누어 3시간에 걸쳐 읽고 모임 안에서 꼽은 명대사를 추렸다고 했다.
그들이 꼽은 명대사를 글로 읽어보고 싶어서 대본집을 찾았다. 마침 평소 정기 구독하는 독서 플랫폼에서 신간임에도 불구하고 앱과 웹에 대본집을 열어주어 반가웠다. 그렇게 신나는 기분으로 대본집을 펴 들고 천천히 말 한마디, 단어 하나를 꼭꼭 씹어먹는 느낌으로 읽어내려갔다.
아는 그 말인데, 왠지 다른 느낌
해준: 기도수 씨가 맞습니까?
(서래가 아득한 눈빛으로 시신을 건너다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고개 젓는 서래. 해준과 수완이 도리어 놀란다.
서래: 산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해준: 마침내…… 저보다 한국어 잘하시네요.
황망하신 중에 죄송합니다만 혹시 패턴 아십니까?
(대본집 <헤어질 결심>, p.42)
언어를 낯설게 느끼면서 긴장은 시작된다. 마침내.. 마침내?! 오랫동안 학수고대하던 일이 이루어졌다는 뜻 아니었나. 얼핏 튀어나온 단어에 진심이 담긴 건 아닐까. 남편인 그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오랫동안 고대해온 일이 ‘마침내’ 이루어졌다는.
<헤어질 결심>이라는 작품을 영화관에서 관람할 때와 글자로 된 대본으로 읽는 기분은 사뭇 달랐다. 아는 말인데도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건 시나리오를 공동 집필한 정서경 작가와 박찬욱 감독이 장치적으로 말이 낯설게 들리도록 배치한 장치 때문이기도 하다. 남편의 살인 사건에 연루된 극 중 서래(탕웨이 분)는 한국말이 부족한 중국인으로 설정됐고, 그를 취조하는 형사 해준(박해일 분)은 관찰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성격으로 보인다. 말의 감각에 최대한 집중할 수 있는 극적 설정을 넣은 것이다.
이렇게 남녀 주인공의 국적과 언어가 다른 상황에 있어, 극 중 소통의 도구로 번역 애플리케이션이 적극 활용된다. 그러나 기술의 완성은 아직 완벽하지 않다. 한국어 문맥상 응당 따라와야 할 단어나 표현이 앱의 오류로 인해 또 다른 극적 긴장이 유발된다.
돌아온 해준, 까마귀 깃털을 만지작거리면서 스마트폰의 통역기 앱을 돌려
아까 녹음한 서래의 말을 해석한다.
남자 성우: (소리) 당신이 먹으려고 살상하는 건 내가 뭐라고 못하죠.
근데 말이야, 내가 밥 주니까 고맙다고 선물을 하는 거라면 그럼 됐어. 진짜로.
나에게 선물이 꼭 하고 싶다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주세요. 난 좀 갖고 싶네.
(대본집 <헤어질 결심>, P. 60)
심장을 가져 다 달라니. 이건 또 무슨, 호러 스릴러 장르와 같은 단어의 선택인가. 게다가 남자 성우의 목소리로 전달되는 번역기의 말은 이질적인 느낌을 더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 심장에 대해 작품 후반부 두 인물이 대화를 나누며 오해를 푼다. 서래는 자신이 말한 뜻은 ‘심장’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말해준다. 그러고 보니 영어 ‘heart’는 한국어에서 전혀 다른 뉘앙스의 두 단어로 번역된다. 이 또한 묘한 언어적 충돌, 이런 말 맛을 제대로 살려낸 덕분에 작품이 더 재미있어진다.
서래: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해준: 우리 일, 무슨 일이요? 내가 당신 집 앞에서 밤마다 서성인 일이요? 당신 숨소리를 들으면서 깊이 잠든 일이요? 당신을 끌어안고 행복하다고 속삭인 일이요? (‘행복’을 언급해 놓고는 더 화가 나)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서 나오는 줄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대본집 <헤어질 결심>, P. 109)
아, ‘붕괴’라는 말이 이렇게 달콤한 말이었나. 극 중에서 중국인 서래는 ‘붕괴’의 뜻을 몰라 인터넷 국어사전을 찾는다. 사전에 붕괴는 ‘무너지고 깨어짐’이라고 뜬다. 그의 ‘심장’이 아닌 ‘마음’이, ‘무너지고 깨어질’ 만큼 아프다니, 그만큼 강렬한 사랑 고백이 있을까.
인터넷 연관 검색어에 뜰만큼 기성세대에게 ‘븡괴’에 따라오는 단어는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 등의 말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괴롭고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그러나 여기 극 중 그리고 실제로도 중국인이기도 한 서래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붕괴’는 전혀 다른 뜻으로 읽힌다. 삶이 무너질 만큼 온 마음을 다해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그리고 극 후반부 연이어지는 독백,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대본집 <헤어질 결심>을 읽다 보면, 매우 정갈하게 다듬어진 명주천을 쓰다듬는 기분이 든다. 명주천 특유의 거친 듯하지만 손에 착 감기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느낌. 대본을 쓴 정서경 작가와 박찬욱 감독이 새삼 존경스러워진다. 말을, 단어와 표현을, 이토록 생경하고도 아름답게 쓰시다니.
해준: (답답하다는 듯 약간 톤이 올라가서)
왜 그런 남자하고 결혼했습니까?
서래: (눈에 힘주고 똑바로 보면서)
다른 남자하고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했습니다.
(대본집 <헤어질 결심>, P. 137)
헤어질, 그리고 결심. 현재는 아니지만 다가올 미래에 무언가 단단히 먹은 마음. 마음은 원하지 않지만 현실에 따라 억지로 돌려세운 서래의 마음으로 읽힌다. 사실 일반적인 한국인이 저 말을 한다면 ‘다른 남자하고 헤어지려고요’ 정도로 풀어서 축약하지 않았을까. 외국인이기에 문장형 구조를 만드는 데 익숙하지 않음을 활용해, 극 중 서래가 마음으로는 원치 않지 않지만 상대방을 위해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표현을 저 몇 글자로 해냈다. 그것도 ‘하려고’ 다음에 문장부호 쉼표를 넣고 ‘했습니다’를 바로 붙어서 말을 가다듬으며 감정을 삼키는 듯한 표현이다. 아, 절묘하다.
서래: 잠은 좀 잡니까?
해준: 병원서 검사했는데 내가 한 시간에 마흔일곱 번 깬대요. 믿어져요?
서래: 건전지처럼 내 잠을 빼 주고 싶네요.
(대본집 <헤어질 결심>, p. 152)
아, 또 한 번 감탄했다. 상대방을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을 건전지와 잠으로 표현하다니. 현대인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점차 표현력이 부족해진다. 지나치게 감정을 절제하고 감추고 내보이지 않는 게 미덕으로 여겨지기 때문.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묘사하기 위한 새로운 표현을 찾는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조차 사치이고 낭비이며, 비효율이라고 은연중에 주입받고 있어서는 아닐까.
나 또한 사회생활을 하던 어느 순간 내 심장이 차갑고 딱딱해졌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상처받고 힘들어하다가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무감각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열정으로 뜨겁던 심장이 차가워져 버린 것 같아 슬펐다. 지금의 마음 상태는… ‘균형’을 찾았다고 하면 될까. 중도의 상태를 유지하자고 생각한다.
해준: 버리라고 했잖아요!
서래: 이걸로 재수사해요.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
자기가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는지 몰라 말 못 하는 해준.
서래, 그의 옷 주머니에서 립밤을 꺼내 바른다. 해준 입술에도.
서래: 난 해준 씨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갔나 봐요.
(대본집 <헤어질 결심>, P. 167)
이전에도 대본집을 읽기도 하고 소장하기도 했다. 확실히 대본이나 시나리오를 번역한 대본집보다는 한국 작가가 쓴 한국어 대본집이 말 맛을 살려내는 매력이 있다. 대본집 <헤어질 결심>의 대사를 곱씹어 읽으며 국어 시간을 좋아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났다.
잃어버린 말의 감각을 찾아서
최근 인터넷에 웹툰 작가 사인회에 예약 오류가 떠서 공지에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라고 주최 측에서 글을 올렸다가 ‘나는 안 심심한데?’라고 조롱당하는 댓글이 올라와 화제였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이 시대 한국인의 문해력과 어휘력, 언어 감수성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는 시각이 대두됐다.
나의 언어 감수성은 현재 어디쯤 있을까 싶어 찾아보게 된 책 <나는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는 대학내일의 미디어센터장인 홍승우 저자가 썼다. 여기에 ‘말에 품격을 더하는 언어 감수성 수업’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각종 홍보미디어 등에서 유행어처럼 남발하는 표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꽤 잔인하고 어법상 저 표현을 써도 되는 건가 싶을 때가 있다.
이 책에서는 비상함에 대한 찬사를 ‘약 빨았다’는 표현으로 쓰고, 사람을 거래하는 사회 풍조상 취업 시장에서 사람을 기계나 자동차의 부품에 비유하는 ‘스펙’이라는 단어를 쓰는 현 세태에 대해 꼬집으며 경각심을 높인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자각하면서 기울이는 노력 중 하나는 일상에서 흔히 쓰던 표현도 인터넷 국어사전을 찾아보고 한자어까지 한 번 더 확인하고 활용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러면 단어에 실린 의미나 무게가 보다 선명해지면서 그 표현을 쓰는 게 맞는지에 대해 판단하게 된다.
그럼에도 일상을 살아가면서 말의 결을 다듬는 노력은 지속해야 할 것이다. 대본집 <헤어질 결심>을 읽으면서 표현을 고르고 다듬어 낸 말의 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 덕분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 #박찬욱 #탕웨이 #박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