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이트 타이거 The White Tiger>(2020)
사막의 달팽이가 사는 집
<The White Tiger>(2021) © Netflix
제가 원했던 것은 단 하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저는 말할 것입니다. 단 하루라도, 단 한 시간이라도, 아니, 단 일 분이라도,
종으로 살지 않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건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었다고.
- 발람의 대사 중, 영화 <화이트 타이거>
영화 <화이트 타이거>는 인도영화의 기존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발리우드 특유의 뮤지컬 장면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도 카스트제도의 구속력과 빈부격차에 따른 문제를 정면에서 바라본다. 이를 전체적으로 암울하고 극현실주의를 영화상에 반영한다. 이 영화는 가난한 촌마을 출신의 총명한 소년 발람이 카스트 계급의 한계로 노예의 삶을 강요받지만, 델리 부잣집 운전기사로 들어가 주인들의 허위와 위선을 온몸으로 겪고 인도 사회에 만연한 부패와 어처구니없는 불합리를 인지하면서 종살이에서 탈출해 새 삶을 꾸리는 과정을 담는다.
그러한 측면에서 영화 <화이트 타이거>는 인도의 <기생충>이라고 불릴 만큼 작품 주제나 소재적 측면에서 동일 선상에 놓인다. 그러한 선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다른 지점이 있는지 궁금해 선택한 영화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관람했을 때, 관객은 ‘좋은 작품인데, 뭔가 찝찝한 느낌’이라는 반응이었다. 특히 그 자신이 박사장(이선균) 가족이 아닌 기택(송강호 분) 가족에 가까울 때 그 찝찝함은 더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하지만, 이야기의 일부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러했던 것이다.
나 또한 기택(송강호 분) 가족에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찝찝함을 느꼈다. 영화 <기생충>의 몇 장면은 내 오랜 기억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첫 장면에 지상과 지하에 반쯤 걸친 반지하 철창을 두고 송강호 가족이 올려다보는 시선과 창 밖의 지나가는 이들의 발과 다리만 보이는 장면, 송강호네 가족이 있는 창쪽에 누군가 오줌을 누고 가는 장면, 폭우가 왔을 때 방보다도 높은 위치에 배치된 변기까지 물이 들어찬 장면 등이다.
<The White Tiger>(2021) © Netflix
영화 <화이트 타이거>에서 주인 아쇽이 운전기사 발람이 머무는 공간에 찾아와 “이런 곳에 살고 있었어요? 여기서 어떻게 살아요?” 라고 묻는 장면이 있다. 발람의 숙소는 지하 주차장의 후미진 구석에 구겨진 양철문을 겨우 달고 있는 곳이다. 흙먼지가 가득한 바닥에 먼지를 잔뜩 머금은 메트리스와 구멍 뚫린 모기장 정도가 집을 구성하는 전부지만 인도 촌구석에서 도시로 올라온 발람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공간이었다.
그러한 장면을 통해 예전에 살았던 반지하의 기억이 살아났다. 초등 4학년 때, 아빠 차를 타고 온 가족이 막 건설 중인 아파트를 보러 갔다. 뿌듯한 표정으로 건설 현장을 보던 아빠는 우리들에게 ‘우리 집이 저기 지어지고 있어. 2년만 고생하고 여기로 이사오자’고 했다. 신축 아파트에 기존에 살던 주공아파트를 팔고 보유 자금을 넣고, 나머지 자금으로 ‘2년간’ 살아야 할 집은 빌라촌의 ‘반지하’였다. 주공아파트에서 건널목 하나를 건너는 거리였지만 환경은 달랐다. 중앙난방이었던 주공아파트와 달리, 반지하 빌라는 연탄을 때고 시시때때 갈아주어야 하고 그 열기로 데운 온수를 찜통에 받아 화장실로 옮겨 날라서 샤워를 해야 하는 집이었다.
그해 여름 폭우는 꽤 강력했다. 당시 집에는 일하러 나가신 부모님 외에 나와 남동생 둘 뿐이었다. 우리집 문턱은 계단 5개를 걸어내려 온 자리에 있었고, 비는 그칠 줄 몰랐고 어느새 차오른 빗물은 문턱을 넘실넘실 넘어 들어왔다. 바가지로 퍼질 물높이는 아니었다. 우리는 그걸 보다가 물을 걸레로 닦아내기로 했다. 주방 바닥에 흥건한 물을 닦고 대야에 걸레를 비틀어 짜고 다시 닦는 작업을 계속 했다. 동생과 나는 모험을 이겨내는 주인공마냥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노래도 부르고 수다도 떨며 작업했다. 외출에서 돌아온 엄마와 이모들은 ‘집에 비가 들이차면 얼른 밖으로 빠져나오지, 안에서 그걸 닦아내고 있었네’며 ‘무섭지 않았냐’며 우리를 안아주었다. 철없던 우리들은 위기에 처한 우리집을 구해낸 마냥 그저 뿌듯했다.
<Paraside>(2019) © CJ ENM
<기생충>속 장면과 같이 폭우가 내렸을 때 반지하라는 환경에 사는 이들은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어렵다. 자신의 안식처를 지켜낼 방법도 없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항의해서 개선을 이끌어낼 대상도 마땅치 않다. 그저 폭우로 인해 벌어지는 상황이나 환경을 피하고 그 피해를 고스란히 끌어안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게 이러한 환경에 처한 이들을 더욱 무기력하게 한다.
대학 3학년 때 독립해서 나 혼자 살게 된 첫 번째 집도 신당동 빌라촌의 반지하였다. 방 1칸과 화장실, 현관에 붙은 주방이 전부였지만,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 기쁨이 걱정과 불안으로 바뀐 건 오래지 않았다. 반지하는 비나 눈이 오면 벽이 축축해져 곰팡이가 쉽게 슬면 아토피와 비염이 있는 나로서는 고단해졌다. 작게 딸린 주방도 환기가 여의치 않아 방으로 연기와 냄새가 곧장 치고 들어오고 이불이나 옷 등에 배어들기 때문에 요리를 해서 끼니를 해결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Paraside>(2019) © CJ ENM
결정적으로는 반지하 단칸방에 여성 혼자 거주한다는 걸 누군가 알았는지, 한밤중 방범창이 있는 창으로 누군가의 발이 멈춰서고 허리를 굽혀 그 창을 들여다보는 시선을 느꼈을 때였다. 다가오는 섬뜩함과 불안은 거대했다. 인기척을 내고 누구냐고 소리도 질러보고 결국 경찰을 불렀어도 순찰해보니 문제없다는 답변을 들었을 때는 세상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는 듯 외롭고 두려웠다. 위험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스스로 대응할 방법이 없다는 것에 무기력함을 느꼈다. 넉넉하지 않은 전세금으로 얻은 반지하였기에 같은 가격에 해당하는 곳을 찾기도 어려워 당장 이사를 하기에는 녹록치 않았다. 반지하라는 환경에 사는 이의 삶은 그렇게 척박함을 온몸으로 느끼는 삶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살고 마침내 망원동 빌라의 지상 2층으로 이사했다. 방2개에 주방이 있고 베란다 확장이 된 집이었기에 도배를 하고 나니 깔끔했다. 두께가 있어 튼튼한 전면 철문도 안심이 됐다. 이 집에서 가장 좋았던 건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온다는 점이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잠에서 깼을 때 행복함을 느꼈다. 편안한 감정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해가 잘 드니 비나 눈이 와도 알러지염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어 건강상으로도 좋았다.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니 삶에서 중요한 부분에 집중할 수 있었고 활력도 생겼다. 지상 2층으로 집을 옮긴 것만으로도 삶의 질은 달라졌다.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휴식과 편안함, 안락함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됐다.
가난 체험, 무엇을 위한 것인가
Brazil Favela © wikipedia
언젠가 서울 시청 내 갤러리 공간에서 세계 빈민층의 삶을 모델하우스와 축소 모형 형식으로 설치해놓은 전시를 본 적이 있다. 국제개발과 구호 활동을 하는 NGO단체에서 마련한 전시였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영상처럼 남아 있는 걸 보면 꽤 강렬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 그 전시를 통해 난 세계 빈민층의 삶, 가난을 ‘체험’할 수 있었다.
브라질의 빈민촌이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최고가 빌딩촌과 마주하고 있는 축소 모형이 있었는데, 그걸 보니 왠지 모르게 슬펐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알기로는 브라질 빈민층이 삶의 개선이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아 자포자기하듯 그들이 어려서부터 생계를 위해 범죄자가 되고 범죄 조직에 가담하게 된다고 들었다. 아프리카의 빈민층이 사는 집을 모델하우스처럼 꾸민 공간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주워 와 크기조차 일정치 않은 나무들을 대충 연결해 움집처럼 지은 곳에 넝마로 지붕을 덮고 넝마를 걸어 공간을 나누었다. 흙바닥에 말린 나무 줄기 등을 깔고 잠을 잔다고 설명문에 나와 있었다.
그건 진정한 가난 ‘체험’이었다. 사전적으로 체험은 주체가 ‘개입’된 ‘경험’과 달리, 주체가 해당 상황과 ‘분리’되어 ‘피상’적으로 접하는 자극을 뜻한다. 그 전시를 통해 빈민층과 ‘나 라는 주체를 분리하고 보이지 않는 경계를 나눈 측면에서 그러한 정보와 자극을 접하는 것이다. 어쩌면 빈민의 삶을 다룬 전시를 ‘관람’하는 건,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나는 그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일종의 안도감과 더불어 최소한 내 삶이 저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상대적인 우월감의 심리가 저변에 깔린 행위였을지 모른다. 그렇게 왠지 모를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난 황급히 그 자리를 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고민
<The White Tiger>(2021) © netflix
가난한 자의 인생은 날카로운 펜으로 온몸에 쓰여 있습니다.
부자들의 꿈 그리고 빈자들의 꿈
그 둘은 절대로 겹치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발람의 말, 원작 소설 <화이트 타이거> 중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와 빈자가 나누어지는 건 당연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주입식 교육을 받아왔다. 그러나 당연이라는 건 없다. 균형이 사라지고 어느 한쪽에만 힘이 실리면 문제가 생기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 사람답게 살 권리, 인권이 무너지면 기계와 달리 인간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고 결국은 사회 체계가 무너지게 된다.
영화 <화이트 타이거>에서 운전기사 발람이 원하는 오직 한 가지,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택한 것은 기묘한 애증관계에 있는 주인 야속의 ‘목을 따고’ 그가 정치인에게 전달하려던 ‘뇌물 비자금’을 탈취해 새 삶을 꾸리는 것이었다. 극중에서 인도의 수많은 부자 중 단 한 명을 살인한 것이지만 이는 발람이 살아온 세계를 가둔 거대한 돔을 깨부순 것과 같았다. 영화 상의 설정이지만 현실을 닮아 있다. 사회 구조는 균열에서 시작해 분열로, 붕괴로 이어진다.
얼마 전 내린 폭우로 반지하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집에 물이 차올라 문을 열지 못해서 탈출하지 못했고 막상 집을 나와서도 오갈 데가 없어 빗길에 한참 발만 동동 구른 이들이 많았다. 자연 재해에 대한 대응에 정부와 공공기관이 나서기보다 시민들과 민간이 도와 위기에 처한 시민을 구호하고 탈출시키는 영상이 온라인으로 공개됐다.
뒤늦게 나선 고위 관직자들은 마치 ‘전시장’을 들르듯 반지하 집을 가서 빼꼼히 ‘구경’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 언론에 내보냈다. 정치인들은 정작 이재민 구호보다 ‘잘 나온 사진’을 기대하고 카메라 앞에 서서 ‘쇼’를 벌였다. 기가 차고 어이가 없는 행동들이었다. 그야말로 자신들의 가난이 보기 좋게 ‘전시’ 당한 입장에 대해 생각은 해봤을까.
루스 리스터 지음 © 갈라파고스
가난을 ‘전시’하는 건 일방적이고 폭력적이며 배타적인 행위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불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빈자’ 혹은 ‘빈민’은 내가 아닌 누군가로 타자화된다. 잠시동안 관심의 대상이 되어 동정 받거나 혹은 무관심 속에 외면 받는다. 도움을 줘야 하거나 무시하거나 연구해야 할 대상으로 치부되면서 경멸과 적대의 대상이 된다.
도서 <풍요의 시대, 무엇이 가난인가>는 빈민의 범주를 보다 넓게 바라본다. 빈민은 단순히 경제적 소득 수준만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회 문화적 기반이 갖춰지지 않아 동등한 시민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는 장애인, 노약자, 시설보호청소년, 한부모가정 등까지 넓혀 바라봐야 한다고 제시한다.
팬데믹을 거치며 소통은 더욱 단절됐고 양극화는 극심해지고 있다. 사회 균열에서 분열, 붕괴로 이어지는 건 한 순간이다. 이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고민과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