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눈치가 빠른 아이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느껴?

by 볕뉘

나는 어렸을 때부터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주변의 공기와 온도를 알고 싶지 않아도 알았다.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할 때마다 미세하게 주변의 공기와 온도가 변하는 걸 알고 있는가. 글자로 적어 내려간 말과 행동은 무형무색의 것이지만, 사람을 통해 나타난 말과 행동은 유형유색의 것이었다. 글자에서 벗어나 사람이 행동하는 순간 생명력을 가져버린 말과 행동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알아달라는 듯이. 유형유색의 것이 된 말과 행동은 감정을 싣고 공기 중을 떠다닌다.


특정한 대상을 향해서 흘러가는 감정도 있지만, 특정한 대상이 있지 않아도 여기저기 닿고 부딪치는 대로 자신을 묻히는 감정도 있다. 그렇다, 나는 그 다양한 감정들을 잘 느낀다. 단순히 감정을 느끼는 것을 넘어서, 마치 내가 느낀 것처럼 선명하게 알아차린다. 때때로 당사자조차 미처 눈치채지 못한 그들의 감정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만큼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할 수 있어서 알아봐 주고 해 줄 수 있는 게 있어서 좋았지만, 너무 많은 감정들이 느껴져 그게 날 짓눌렀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좋으면서도 힘들었다.


그러다 ‘분리’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무리 나와 가깝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는 것. 그 몫은 내가 대신해 줄 수도 대신할 필요도 없다는 것. 그것을 머리로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이제는 나의 선택에 따라 그 감정을 같이 감당하거나 살피고, 타인의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되거나 휩싸이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딱 하나, 가족에 대해서는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성격으로 인해, 눈치가 빠르고 소위 센스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물론 나의 성격도 있지만 되돌아보니, 그 배경에는 집안에서 느껴지던 크고 작은 여러 감정들에 명명조차 못한 채 움츠러들던 내가 있었던 것 같다, 어린아이였던 내가 매몰되지 않고 있으려면 척척척 알아차리고 행동해야 했다. 그 감정이 나를 향하지 않아도, 그 감정에 어린아이였던 나는 분별하지 못한 채 스펀지처럼 흡수해 버렸기 때문이다. 누구 하나 나에게 거칠게 대하거나 무관심하지 않고, 사랑과 관심을 가득 받고 자랐는데. 참 아이러니하다.


나는 감정을 실어 말하는 걸 참 싫어한다. 이제는 감정을 싣지 않고서도,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안다. 그래도 어른다운 어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른다운 어른이 잘 없는 요새이지만, 어른다운 어른이 되고 싶다. 내게 다가오는 타인의 감정에 대처하는 법, 나에게 오는 감정이 모두 나로 비롯되지 않는다는 것, 나의 잘못이 아닐 수 있다는 것. 어린 나에게는 그런 말들이 필요했을 것 같다. 그렇게 가득한 사랑 속에 자랐지만 감정을 너무 잘 느끼던 난 눈치를 배웠다. 그렇게 눈치가 빠른 아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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