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입맛에 가장 다정한 일본 와인의 세계
일본 와인의 역사는 약 100년 남짓이지만, 그 안에는 생각보다 다이나믹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위스키도 좋지만, 일본 와인 한 병을 집에 가져와 마셔보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이다. 한 병의 술에 담긴 역사를 알고 마시는 것과 그냥 마시는 건 분명 다르니까.
개인적으로 일본에 가면 와인 한 병쯤은 꼭 사 오게 되는데, 그 이유를 정리해봤다.
와인은 기본적으로 서구권 식문화에서 출발한 술이다. 그러다 보니 비싼 돈 주고 샀는데도 한국인 입맛에 묘하게 안 맞아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나 같은 'MBTI I형 인간'에게 한국에서의 와인 쇼핑은 약간의 고난이도 미션이다.
마트에서 직원이 다가오면 식은땀부터 난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빈손으로 돌아서긴 뭔가 미안하고, 백화점은 더하다. 직원들 정말 득달같이 달려드는 느낌이라, 혼자 편하게 구경하고 싶은데 직원이 없거나 사람이 많은 타이밍을 노려 호다닥 둘러보고 도망치듯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어찌저찌 고른 와인을 집에서 마셔보면 실패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꽤 있다.
하지만 일본 와인은 다르다. 기본적으로 '동아시아의 터치'가 들어가 있다. 같은 쌀 문화권, 비슷한 식재료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만든 술이라 그런지,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의 입맛에 잘 달라붙는다. 실패할 확률이 현저히 낮다는 뜻이다. 직원의 설명 없이 라벨만 보고 골라도, 내 입맛과 준비한 음식에 잘 어우러질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일본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은 바로 '주류 쇼핑'이다. 단순히 종류가 많아서가 아니다. 한국의 주류세와 비교하면 일본의 와인 가격은 그야말로 착하다. 꼭 일본 와인이 아니더라도, 일본으로 수입되는 전 세계 와인과 위스키 같은 양주가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표를 달고 있다.
특히 일본 와인은 가격대별 퍼포먼스가 훌륭하다. 1,000엔∼2,000엔 (약 1~2만 원) 정도의 데일리 와인만 집어도 "이 가격에 이런 맛이?" 하는 감탄이 나온다. 만약 큰맘 먹고 3,000엔 후반에서 5,000엔 정도를 투자한다면, 한국에서는 십만 원대 이상을 줘야 느낄 법한 훌륭한 퀄리티와 섬세함을 경험할 수 있다. 부담 없는 가격으로 최상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건 덤이다.
사실 이게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일본 와인은 생산량 자체가 유럽이나 신대륙(칠레, 미국 등)에 비해 현저히 적다. 게다가 그 적은 생산량의 대부분이 일본 내수 시장에서 소비된다. 즉, 정말 유명한 몇몇 브랜드를 제외하고는 한국으로 수출되는 물량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아니 거의 제로라고 봐도 될 정도이다.)
한국의 와인 샵이나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레어템'을 현지에서 마셔보거나 사 오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전리품으로서 가치는 충분하다. 와인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여행자라면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라고 본다.
유럽 와인이 버터나 치즈, 붉은 육류의 기름기를 씻어내기 위해 타닌(떫은맛)과 산도가 발달했다면, 일본 와인은 '감칠맛(Umami)'과 어우러지도록 진화했다.
우리가 여행 가서 먹는 스시, 튀김(덴푸라), 혹은 편의점에서 사 온 어묵탕이나 컵라면까지. 이 음식들의 공통점은 '국물(다시)'과 '간장' 베이스라는 점이다. 일본의 '코슈(Koshu)' 화이트 와인이나 '머스캣 베일리 A' 레드 와인은 아시아 음식의 맛을 해치지 않고 은은하게 받쳐준다.
앞에서 언급한 '직원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I형 인간'에게 일본은 천국과도 같다. 굳이 전문 와인 샵에 가지 않아도 된다. 숙소 근처의 '칼디(Kaldi)', 혹은 '이온(AEON)' 같은 슈퍼마켓만 가도 와인 라인업이 충분히 다양하다.
일본은 일반 슈퍼의 바이어들의 큐레이션 실력이 꽤 좋은편이라, 마트 와인 코너에만 가도 '베스트 셀러', '스태프 추천', '어울리는 안주' 같은 팝업이 아주 친절하게 붙어 있다. 직원이 따라붙지 않으니 일본어를 못한다고 하더라도 번역기 카메라를 켜고 느긋하게 라벨을 읽어보며 고를 수 있다.
심지어 세븐일레븐 같은 편의점 자체 브랜드 PB 와인조차도 웬만한 데일리 와인 뺨치는 맛을 자랑한다. 심리적 장벽 없이 와인을 집어 들기에 이보다 좋은 환경이 어디 있겠는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캐리어에서 꺼낸 와인 한 병이 여행의 추억을 만들어 줄 때가 있다. 어떤 와인이 좋을까하면서 휴대폰 들여다보면서 고민하고 AI에게 물어봐가면서 조사하고 나서 골라온 일본 와인 한 병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여행의 한 페이지를 담아오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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