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프랑스산이 아니라고?

류블랴나의 기적부터 '가장 일본다운' 코슈의 탄생

by 리트리버
비 때문에 포도가 맛이 없다고? 그럼 우산을 씌우면 되잖아!"라는 광기 어린 발상이 일본 와인을 구원했다. 유럽종 포도를 상전 모시듯 비닐 지붕을 씌워 키워낸 이 지독한 '오타쿠 농법(비가림 재배)' 덕분에, 일본은 장마와 태풍을 뚫고 기어이 세계 와인 지도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일본의 농부와 양조가들이 비닐우산을 씌워가며 키워낸 유럽종 포도는 헛되지 않았다. 그들의 땀방울이 '와인의 본고장' 유럽을 정면으로 강타한 사건이 발생한다.


1989년, 슬로베니아에서 열린 '류블랴나 국제 와인 콩쿠르'.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진행하던 심사위원들은 한 레드 와인을 맛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아한 향과 섬세한 타닌, 완벽한 밸런스. 심사위원 전원 모두 이 와인은 프랑스 보르도나 부르고뉴의 명가에서 만든 와인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병의 라벨이 벗겨졌을 때, 장내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 와인은 프랑스산이 아니었다.


image.png 사진 속 제은 2019년도 산


"Château Mercian Kikyogahara Merlot 1985 (샤토 메르시앙 키쿄가하라 메를로)"

믿을 수 없게도 그것은 일본 나가노현의 산비탈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이었다. 해발고도가 높은 일본 알프스 분지, 화산회토와 자갈이 많아 물이 고이지 않는 척박한 땅. 그곳이 빚어낸 기적 같은 일이었다.


120년 전통의 이 권위 있는 대회에서 일본 와인이 당당히 '대상(Grand Gold Medal)'을 거머쥐는 미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일본 같은 습한 나라에서 제대로 된 와인이 나올 리 없다"는 와인계의 편견을 단 한 병의 와인으로 깨부순 순간이었다. '모방'으로 시작했지만, 결국에 '실력'으로 유럽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영광의 순간에도 일본 와인 메이커들의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결국 서양의 품종으로만 만들어야 하나? 일본만의 '오리지널리티'는 어디에 있는가?"


image.png 실제 코슈 포도의 사


그들의 시선은 다시금 일본의 토착 품종인 **'코슈(Koshu, 甲州)'**로 향했다. 1000년 전부터 일본 땅에서 자라온 이 분홍빛 껍질의 포도는 오랫동안 식용이나 저렴한 스위트 와인용으로만 취급받았다. 수분이 많고 맛이 밍밍해서 "물 같다"는 혹평을 듣기 일쑤였고, 드라이한 고급 와인을 만들기엔 부적합하다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반전'이 시작된다. 와인 메이커들은 코슈의 단점을 장점으로 뒤바꿀 묘수를 찾아냈다.

그들은 효모 찌꺼기와 와인을 함께 숙성시키는 제법을 도입했다. 그러자 밍밍했던 고슈 와인에 깊은 풍미와 기분 좋은 감칠맛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껍질의 쓴맛은 기분 좋은 쌉싸름함으로 변했고, 특유의 산미는 유자 같은 일본 시트러스의 향을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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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고슈 와인은 '일본 음식'과 완벽한 페어링을 보여주었다.

향이 강해 생선회의 맛을 덮어버리는 서양 화이트 와인과 달리, 코슈는 담백하게 생선의 비린내를 잡고 감칠맛을 끌어올렸다. 한국의 활어회 문화와 다르게 일본은 숙성회 문화가 발달한 곳인지라 생선이 숙성되면서 나오는 '이노신산'이라는 성분의 감칠맛이 폭발하는데, 코슈 와인은 이 감칠맛을 끌어올려내는 것이었다.

이 마리아주는 생선에만 머물지 않았다. 다시마 육수(다시)와 간장을 베이스로 하는 스시, 덴푸라, 그리고 짭조름한 가정식 조림 요리까지. 코슈는 일본 요리 특유의 감칠맛을 완벽하게 아우르는 '진정한 일본 와인'으로 거듭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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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일본의 와인 숍이나 비스트로에 가면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다.

나가노와 홋카이도 등지에서 장인 정신으로 빚어낸, 본토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유럽 품종 와인'. 그리고 일본의 자연과 식탁을 그대로 담아낸, 섬세하고 우아한 '일본 와인'.


특히 이 코슈 품종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건 불과 얼마 전이다. 2010년, OIV(국제와인기구)에 'Koshu'라는 이름으로 정식 품종 등록이 됐다. 이게 무슨 의미냐면, 이전까지는 해외 수출할 때 라벨에 'Koshu'라고 못 쓰고 그저 '일본 포도'라고 써야 했는데, 이제는 'Chardonnay(샤르도네)'나 'Merlot(메를로)'처럼 당당하게 품종명을 적을 수 있게 된 거였다.


서구화를 동경하며 시작된 일본 와인의 역사는, 서양을 따라잡으려는 치열한 투쟁을 거쳐, 마침내 '가장 일본다운 것'을 찾아내는 여정으로 완성되고 있다.


NOTE :지금까지의 5개의 에피소드를 요약한 PDF 파일도 첨부했으니 필요하신 분들은 보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이미지 출처

나노바나나 이미지 생성 및 구글 이미지 검색

역사적 자료는 역사 자료로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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