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0원, 루마니아산, 신성 핑크, 정화 스킬 보유
작년 여름, 와이프가 모처럼 금요일에 휴무를 받았다. 나 역시 눈치 볼 것 없이 연차를 냈다. 멀리 가기는 부담스럽고, 집에는 있기 싫은 날. 우리는 구로디지털단지에 있는 롯데시티호텔로 향했다.
우리가 연애하던 시절, 이곳은 주말 1박에 8~10만 원이면 충분했던 가성비 호텔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물가가 오른 지금은 금요일 숙박비도 꽤 올랐지만, 그래도 5성급 호텔에 비하면 만만하다. 체크인을 하고 에어컨 빵빵한 객실에 입성.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뒹굴거리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파왔다.
사실 호텔 근처에 레스토랑이나 오마카세도 있었지만, 뭔가 우리 둘의 감성에는 역시 '이마트'였다.
근처 이마트에서 노란색 할인스티커 붙은 음식들고 둘이서 와인 매장에서 고민하다가 굳이 2만원 넘는 와인은 사고 싶지 않아서 정말 신중에 신중을 가해서 와인 매장을 둘러다니면서 보다가 가져온게 루마니아에서 온 솔라라 로제 와인이다.
(정말 아쉽게도 평소에 사진을 찍는 편이 아닌지라, 이마트에서 사진 찍을 생각을 못했다.)
이름: 솔라라 로제 와인
생산지: 루마니아
(드라큘라의 고향으로만 알았는데, 루마니아는 유럽 내에서도 와인 가성비가 좋기로 유명하다.)
품종: 메를로(Merlot) + 페테아스카 네그라(루마니아 토종 포도) 블렌드
가격: 약 18,000원
비고: 네추럴 스타일 로제 와인
네추럴 와인은 뭐고, 네추럴 스타일의 와인은 무엇?
네추럴 와인이란 유기농 포도를 자연에 맡겨 발효시킨 와인인데, 자칫하면 쿰쿰한 냄새 때문에 상한 거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이 와인은 '네추럴 스타일'이라 약간의 생산자 터치가 들어가서, 그 특유의 쿰쿰함 없이 깨끗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사실 고백하자면, 이번에도 라벨이 예뻐서 집었다. (제 1순위 이유)
두번째는 가격은 더 착했다. 와인 장터 행사가로 18,000원. 무엇보다 매대에 딱 한 병 남아있었다. '사람들이 다 집어가고 하나 남은 거면 맛있는 거 아닐까?' 하는 단순한 믿음으로 냉큼 카트에 담았다. 비비노(Vivino) 앱을 켜보니 평점도 나쁘지 않았다. 이거면 충분했다.
색상 : 연어회 색감
향 : 거칠지만 솔직한 느낌의 상쾌한 과일향 - 딸기 으깻을 때 나는 향
맛 : 입안에서 간질간질한 기포가 느껴지고 드라이한 와인이지만, 과일향이 워낙 풍부해서 향기만으로 혀에서 잔당감이 느껴진다. 목으로 넘기니 백화점에서 파는 고급 크렌베리주스가 입안을 감싸주는 거 같다.
어떤 와인 전문가분께서 이런 평가를 남겼다고 한다.
이 와인은 익숙한 '메를로(Merlot)'와 루마니아 토착 품종인 '페테아스카 네아그라(Fetească Neagră)'를 섞어서 만들었다. 메를로의 부드러움과 토착 품종의 스파이시한 매력이 섞여서, 밍밍하지 않고 꽉 찬 맛을 낸다.
(NOTE : 메를로라는 품종은 굉장히 부드러운 포도 와인 품종이고 페테아스카 네아그라 라는 품종은 엄청나게 무겁고 거친 맛의 포도 품종이라고 한다.)
누가 보면 초라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연애 시절부터 우리는 이 맛을 즐겼다. 봉투도 없이 손에 전리품처럼 들고 온 식어빠진 새우튀김, 닭강정, 그리고 연어 초밥.
호텔로 돌아와 좁은 원형 테이블에 음식들을 쫙 펼쳤다. 비록 접시는 없어서 뚜껑을 앞접시 삼아 먹지만, 그런데 이 18,000원짜리 와인이 이 음식들을 멱살 잡고 하드캐리하기 시작한다.
와인의 자잘한 기포가 눅눅해진 튀김의 기름기를 잡아주고, 달큰한 양념 맛을 와인의 상큼한 베리향이 함께 리드하면서 목으로 넘겨준다. 연어초밥도 비록 마트 연어초밥이었지만, 선도가 굉장히 좋아서 그랬는지 와인의 산도가 연어 기름기를 칼같이 잘라내고 연어의 풍미와 초간장 풍미가 상승 해버리면서 할인스티커 붙은 마트 초밥이 생명력을 찾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이 와인도 지난번 클레멘타인 오렌지와인처럼 세미 만능에 가까운 와인이긴 하지만, 이 와인은 굳이 엄청난 요리가 아니어도 될 거 같다.
1순위 페어링 : 해산물 > 특히 갑각류나 버터에 구운 생선스테이크, 패류 요리에 강추
2순위 페어링 : 감자칩 > 포카칩, 수미칩 추천
3순위 페어링 : 흰색 육류 요리 > 특히 시중 프랜차이즈 순살 후라이드 치킨
4순위 페어링 : 로제떡볶이 > 배떡 시그니쳐 로제떡볶이
블리자드 게임 <디아블로>의 성기사(Paladin) 같은 캐릭터라고 느꼈다.
일단 외관부터가 그렇다. 칙칙한 어둠이 아니라, 잔에 따르는 순간 영롱하게 빛나는 핑크색 신성한 빛(Holy Light)이 쏟아지는 느낌이다.
이마트 마감 세일 초밥과 식어빠진 닭강정과 새우튀김을 보자. 냉장 쇼케이스의 찬 기운을 맞아 딱딱하게 굳어가고, 튀김옷은 눅눅해져서 사실상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솔라라 로제 와인이 만나면서, 성기사가 '정화(Purification)' 스킬을 시전한 것처럼 음식의 생명력을 불어 넣어준다.
유치할 수도 있는 총평이지만, 내 솔직한 평가는 이러하다. 근데 디아블로 해본 사람은 이 비유가 와닿을 것이다. 18,000원으로 이 정도 정화 스킬을 시전하면 이건 가성비 성기사다. 이마트 와인 매대에서 이 라벨 보여서 카트에 넣는다면 이 성기사가 당신의 초라한 식탁에 신성한 빛을 내려줄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