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마초인 줄 알았는데 딸기우유였던 와인
집 근처에 있는 대형마트를 갔다가 낯익은 와인을 발견했다.
내가 즐겨보는 와인 유튜브 채널 '와인 잔마이'에서 봤던 라벨이었다.
개인적으로 '와인잔마이'라는 일본 와인 유튜브 채널을 구독해서 보는 이유가 이 분은 가격 정보를 아주 투명하게 공개하는 편이고 말씀하시는 것이 굉장히 명확하게 이야기해 주셔서 정기적으로 시청하고 있는 채널이다.
(일본어를 할 줄 아시는 분이라면 채널에 직접 들어가셔서 보시는 것도 추천하고 일본어를 모른다고 해도 Notebook LM이라는 AI를 사용하면 영상 내용을 요약하는 것도 가능하니 궁금하신 분들은 참고하셔도 좋을 듯하다.)
이 분께서는 '밴드 카베르네 소비뇽'이라는 와인을 추천 (1병 980엔)하셨고 내가 롯데마트에서 발견한 와인은 '밴드 화이트 진판델'이었다. 롯데마트에서 11,800원에 데려온 와인이다.
2018년 빈티지로 와인잔마이 채널 주인장분의 추천을 믿고 사봤다. 물론 완벽하게 동일한 제품은 아니지만, 같은 와이너리에서 나온 와인이니 저렴하지만 기대를 하면서 구매했다.
일단 '진판델'이라는 포도 품종에 대해서 아주 살짝 짚고 넘어가고 싶다.
진판델(Zinfandel). 이 포도는 한마디로 미친 마초다. 맛이 드라이한 정도가 아니라 입 안의 수분을 전부 징수해 간다. 타닌은 혀를 쥐어짜고, 알코올 도수는 14~17%이다. 일반 와인이 맥주라면 이 녀석은 소주다. 거기에 후추향 같은 스파이시함까지 때려 박혀 있어서 한 모금 마시면 불량배가 입 안에서 난동을 부린다. 솔직히 말하면 내 취향은 아니다.
그러나 이 '화이트 진판델'은 달랐다.
이 조폭 두목한테서 껍질만 살짝 스치게 한 다음 연한 핑크색 원액만 쏙 빼낸 거다. 그리고 화이트 와인처럼 발효시켜 버렸다. 결과물이 어떻게 됐냐면, 거친 주먹은 전부 사라지고 딸기향 입힌 실크 장갑만 남았다. 아까 그 조폭 두목이 지금은 딸기우유 들고 있는 느낌이다.
이름: 밴드 캘리포니아 화이트 진판델 (Bend California White Zinfandel)
빈티지 : 2018년
생산지: 미국 캘리포니아
품종: 진판델 100%
가격: 11,800원 (롯데마트 구매)
비고: 레드와인 포도 품종으로 만든 로제와인
일단 코르크 따는 순간 첫인상.
백화점 딸기 코너 앞에 서 있는 느낌인데 거기에 오렌지가 슬쩍 끼어든다. 코로 먼저 기분이 좋아지는 와인인데, 향에 속아서 한 모금 넘기면 반전이 온다. 맛이 엄청 드라이할 줄 알았는데 반전의 달달함이 입안을 감싸고 딸기향은 그대로인데 맛은 달달한 청포도. 진판델 맞는데 성격이 완전히 바뀌어서 왔다.
그렇다고 그냥 무작정 달기만 한 물 같은 와인도 아니다. 로제 치고는 조금의 파워가 있고, 끝에 백후추 향이 '나 원래 진판델 맞다니까.' 하면서 살짝 올라온다. 이 마무리가 인상 깊다. 달달함에 취해 있다가 마지막에 약간의 후추가 정신 차리게 해주는 이 완급 조절. 11,800원짜리가 이런 구성력이라니 말이 되냐.
말이 된다. 왜냐면 이 와인, 진짜로 2020 대한민국 주류대상 로제 와인 부문 Best of 2020을 수상받았다.
BEND는 '인생의 굽이굽이'를 상징하는 브랜드라고 한다. 그래서 라벨의 뒤를 읽어보니 시적인 문구가 인상 깊었다.
[In twists & turns, this life takes shape.]
[Embrace the bends in life's journey.]
삶의 굴곡과 변화 속에서 삶은 모양을 갖춰간다.
삶의 여정 속에 있는 그 굴곡들을 포용해라.
저렴한 와인이지만 라벨에 적힌 한 줄은 묵직하다. 삶의 여러 굴곡(Bends)에서 만나는 순간들 속에서 이 와인과 함께 해달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냉동만두. 그리고 냉동치즈스틱이다.
주류대상 수상 와인의 페어링을 냉동실 처박혀 있던 치즈스틱과 냉동만두로 시도해 본다.
일단 군만두를 한 입 깨무는 순간 고기 육즙이 입 안에 퍼지는데, 여기에 이 달달한 딸기우유 로제를 한 모금 흘려보내면 육즙이랑 과일향이 입 안에서 왈츠를 춘다. 만두 껍질의 바삭한 식감이 와인의 산미랑 부딪히면서 서로를 완성시켜 주는 이 시너지. 11,800원짜리 와인 팀장이 냉동만두 대리를 부장으로 승진시켜 버린다.
치즈스틱은 더 심하다. 늘어나는 치즈의 고소함 위에 이 딸기향 로제를 얹는 순간, 분명 그냥 가정집 아일랜드 식탁에서 와이프랑 스탠딩으로 먹고 있는데 입 안은 캘리포니아에 와 있는 기분이다. (아니다. 그건 좀 과장이다. 근데 맛있는 건 사실이다.)
이 와인은 와인 초보자한테 추천하기에 완벽한 녀석이다. 달달하고, 향 좋고, 부담 없고, 가격까지 착하다. 무엇보다 이 글 읽으시는 남자분들, 여친이나 와이프랑 홈술 데이트에 이거 슬쩍 꺼내 보시라. 딸기향에 달달한 맛까지, 분위기 세팅 충분하다.
반대로 드라이하고 묵직한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살짝 부족할 수 있다. 진판델이라는 이름만 보고 샀다가 낭패 볼 수도 있으니 그건 감안하시길.
근데 11,800원이다. 실패해도 치킨 한 마리 값도 안 된다. 이 가격에 이 퀄리티면 안 사볼 이유가 없다. 냉동만두 옆에 하나 슬쩍 넣어두면 된다. 어차피 같이 먹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