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맘 먹고 산 10만 원대 와인의 배신
그리고 내 지갑과 통장은 아직도 이 날의 트라우마에서 회복 중이다.
와인 전문가가 아니고 그냥 즐겨 마시는 사람이다 보니 비싼 와인에 대한 환상 같은 게 있었다.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비싸면 맛있겠지, 10만 원짜리가 1만 원짜리보다 당연히 맛있겠지.라는 그 단순한 공식을 믿었다. 어리석었다.
그래서 신혼여행 준비 시즌에 큰맘 먹고 10만 원대 와인을 2병이나 샀다. 내 인생 최대의 와인 지출이었다. 물론 세상에는 50만 원, 100만 원, 1000만 원짜리 와인들도 있다. 근데 그건 그들만의 시장 속에 있는 와인이고 나한테는 10만 원짜리가 지갑에서 피가 나는 결심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온 와인이다. 근데 그냥 캘리포니아가 아니다. '소노마 코스트'라는 곳에서 왔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캘리포니아의 쨍한 햇볕, 야자수, 비치발리볼 그런 지역이 아니다. 소노마 코스트는 안개가 끼고 찬바람이 부는 서늘한 지역이다. 이 환경에서 포도가 천천히 익기 때문에 산미가 잘 살아있는 신선한 와인이 나온다고 한다.
포도 품종은 '피노 누아'. 이 포도가 뭔 녀석이냐면 와인계의 금수저다. 우아하고, 가볍고, 비싼 고급 와인에 빠지지 않는 단골 품종인데 문제는 이 녀석이 유리멘털이다. 병충해에 약하고 손이 무진장 많이 간다. 인건비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들어가는 포도. 쉽게 말하면 맛은 여왕인데 체력은 병약 공주인 품종이다.
소노마 코스트에서 나오는 피노 누아에 대한 평가도 좋은 편이라 기대가 있었다. 데일리샷에서 예약 걸고, 내가 사는 동네에서 송도 와인샵까지 원정 가서 픽업해 왔다. 10만 원짜리를 모시러 가는 거니까 자세가 달랐다.
결론부터 말하면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대충 자료를 찾아보면 시음 노트에 뭐가 길게 적혀있다. 수상 경력도 있다고 한다. 근데 첫 모금 했을 때, 서민의 혀를 가진 나로서는 도통 공감이 안 갔다. 전문가들이 적어놓은 그 화려한 묘사가 내 입 안에서는 재현이 안 된다. 마치 설명서는 화려한데 조립하면 다른 게 나오는 가구 같았다.
맛이 없냐고? 그건 아니다. "에이 맛없어!" 하고 뱉을 와인은 절대 아니다. 근데 맛이 산발적이다. 포도의 향이 올라오려다가 사라지고, 뭔가 밸런스를 잡으려고 이것저것 시도한 노력은 느껴지는데 결과물은 이도저도 아닌 맛이 됐다. 비유하자면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맛이다. 뼈대는 있는데 살이 없다. 복합미라는 걸 추구한 건 알겠는데, 내 혀에서는 그 복합미가 복잡미로 바뀌어 버렸다. 맛이 많은 게 아니라 맛이 헷갈리는 거다.
와인 색깔 자체는 이뻤다. 근데 이쁘면 뭐 하나. 마시는 건데. 3~4만 원짜리 와인보다 맛이 없었다. 10만 원이라는 돈이 공중에서 분해됐다. 나한테는 아직도 아픈 추억이 있는 와인이다. 지갑도 아프고 마음도 아팠다.
이건 우리 동네 GS어플에서 와인 25 플러스로 주문을 하여 집 앞 GS더프레쉬마트에서 픽업했었다. 이 와인을 고른 이유는 빈티지한 라벨의 느낌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흑백 사막 위에 무심하게 서있는 듯한 나무에다가 이름이 8 Years in the Desert. 사막에서의 8년. 영화 포스터 같은 몽환적 느낌에 구매를 해봤다.
오린 스위프트(Orin Swift)를 만든 데이비드 피니라는 사람인데 변호사가 꿈이었다. 이탈리아 교환학생 가서 와인에 빠져 24살에 와이너리를 세운 남자다.
(참고로 '오린'은 아버지 미들네임, '스위프트'는 어머니 결혼 전 성.)
2000년, 이 사람이 만든 '더 프리즈너(The Prisoner)'라는 와인이 미국에서 대히트를 치는데 이 와이너리 대표 데이비드 피니 피니는 대량 생산 브랜드의 관리자가 되어가고 있었으나 본인은 "포도밭에서 하루 종일 있는 게 훨씬 편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와인 만드는 것 자체에만 집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브랜드가 커질수록 경영·마케팅·유통 업무가 늘어나는데, 그게 자기 체질이 아니었던 거다. 이 브랜드는 결국 3,800억 원에 팔려 나간다.
근데 매각 조건이 "8년간 더 프리즈너에 사용한 품종 진판델로 와인 만들지 마."라는 내용이었다.
치킨집 사장이 가게를 팔면서 "8년간 같은 동네에서 치킨 튀기지 마세요"에 도장 찍은 거다.
자기를 스타로 만들어준 품종을 8년간 못 건드린다.
그 8년 동안 다른 와인을 만들면서 짧은 소설을 썼는데, 첫 챕터 제목이 '사막에서의 8년'이었는데, 2018년, 계약이 풀리자마자 그 제목(8 Years in the Desert)을 그대로 와인 이름에 붙였다.
이건 신혼여행에 직접 들고 가서 따서 마셨다.
진판델(Zinfandel)
쁘띠 시라(Petite Sirah)
쉬라즈(Syrah)
이 3가지 품종을 블렌딩 하여 만들었고 라벨의 시크함과 와이너리의 스토리를 들어보니 더욱 기대가 올라왔다.
코를 가져다 대면, 검붉은 베리향, 바닐라, 초콜릿, 향신료가 한꺼번에 엄청나게 복합적인 향이 후각 세포를 자극시킨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신혼여행 가서 휴양지 리조트에서 그리고 스위트룸이라는 고급객실에서 룸서비스까지 팍팍 시키면서 저 비싼 와인을 따면 솔직히 분위기에 취해서 맛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일단 첫 입을 먹었을 때, 사공이 많으니 배가 산으로 가는 느낌이었다.
각각의 품종이 나쁜 게 아니다. 개별적으로는 다 훌륭한 포도들이다. 문제는 이 녀석들이 한 병 안에서 각자 자기 존재감을 어필하느라 정신이 없다는 거다. "나 맛있어요!" 옆에서 "저도 여기서 이렇게 존재하고 있어요!" 옆에서 "잠깐, 저도 한마디만요!" 이 난리통이 입 안에서 벌어진다.
각각의 포도 품종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노를 젓는 바람에, 배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고, 한 방향으로 '이 맛이다!' 하고 다가오는 게 아니라, 여러 맛이 동시에 웅성웅성거리다가 그냥 흩어져버린다.
알코올 16.1%도 한몫한다. 뒤끝에 알코올의 열감이 올라오는데, 이게 풍미를 정리해 주는 게 아니라 이 난리통 속에 기름을 붓는 느낌이었다.
캔우드는 설명서는 화려한데 조립하면 다른 게 나오는 가구였고, 오린 스위프트는 사공이 많아서 배가 산으로 간 와인이었다. 둘 다 맛없다고 뱉을 정도는 아니었다. 비싼 와인은 누군가에게는 맛이 좋은 와인이겠지만, 그 복잡함이 맛있게 느껴지려면 훈련된 혀가 필요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라는 말이 괜히 있던 게 아니었다.
수업료 약 25만 원. 그리고 내 지갑과 통장은 아직도 이 날의 트라우마에서 회복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