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별과제 중 조용하지만 할 일 하는 애
테이블 위에 와인 두 병이 나란히 서 있다.
왼쪽은 Bogle Family Vineyards 2022 Merlot, California.
오른쪽은 Asconi "Uneori" Merlot, Moldova.
생산지는 무려 1만 킬로미터 넘게 떨어져 있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와, 루마니아-우크라이나 사이에 끼어있는 작은 동유럽 내륙국.
그런데 두 병 모두 라벨 아래쪽에 같은 단어가 적혀 있다.
메를로라는 포도품종이 생소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인들 입맛에 가장 잘 맞는 포도품종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포도품종 중에 하나이다.
엄청나게 거친 타닌을 가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마냥 바디감이 가벼워서 심심하지도 않은 밸런스 자체가 좋은 품종이다.
와인 세계에서 대표적 레드 와인 품종을 대략적으로 줄 세우면 이런 그림이 된다.
타닌 자체가 부드러워서 처음 마시는 사람에게도 편안하게 마실 수 있고, 마치 밸런스 패치 잘되어 있는 게임캐릭터 같은 존재이다. 그렇다고 튀지도 않고 조용하지만, 확실히 제 일은 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블렌딩 와인에서도 상당히 빛을 발하는 품종이다.)
우리동네 GS어플에서 와인25 플러스로 주문했고 쿠폰 먹여서 27,900원에 구매했다.
와인 이름 : Bogle Family Vineyards 2022 Merlot, California.
와이너리 간단 배경
보글 패밀리 빈야즈는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남쪽 클락스버그(Clarksburg)에 자리 잡은 가족 경영 와이너리이다. 50년 넘게 같은 땅에서 포도를 키워온 집안인데, 고급 와인보다는 합리적인 가격에 꾸준한 품질이라는 포지션으로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향 : 코를 가져가면 블랙베리, 블랙 체리가 먼저 올라온다. 근데 과일폭탄처럼 터지는 게 아니라, 조용히 손 흔드는 정도. 그 뒤로 살짝 달콤한 바닐라, 토스트, 같은 오크통 특유의 향이 깔려 있다.
맛 : 밸런스 패치 제대로 된 와인이다. 검은 베리류의 잔잔한 단맛이 혀 위에 먼저 내려앉고, 그 위로 벨벳 같은 타닌이 혀를 감싸준다. 거칠지 않고 껄끄럽지 않다. 산미는 있는데 튀지 않고, 과일은 있는데 달지 않고, 타닌은 있는데 떫지 않다. 조별과제의 희망 편을 본 느낌이다.
근데 이 와인의 진짜 매력은 여기서부터다.
1일 차 : 역시 미국 캘리포니아의 메를로 와인답게 직관적으로 맛있다는 게 느껴진다.
2일 차 : 어제 노크만 하던 블랙베리가 오늘은 문을 열고 들어와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 과일 향이 좀 더 또렷해지고, 그 뒤에 숨어 있던 허브랑 흙 내음이 자기 목소리르 내기 시작한다.
3일 차 : 메를로라는 품종 자체의 둥글고 부드러운 밸런스가 가장 잘 드러난 타이밍. 과일, 타닌, 산미가 회담을 끝내고 합의문에 서명한 상태 같았다.
와인은 오픈하면 그날 다 마셔야 한다고 하는데, 오히려 하루이틀 열어두고 나서가 본 게임에 들어가는 느낌이다. 첫날 다 마셨으면 이 와인의 진짜 얼굴을 못 볼 뻔했다.
https://brunch.co.kr/@rain562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