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메를로 2

와인 역사는 5,000년의 나라에서 온 메를로

by 리트리버


몰도바라는 이름을 듣고 바로 위치가 떠오르는 한국인이 몇 명이나 될까. 나는 처음에 도시명인 줄 알았다.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끼어 있는 동유럽의 작은 내륙국. 인구 약 260만 명.

한국으로 치면 대전광역시 인구의 두 배가 안 되는 나라다.


이 나라를 내가 어떻게 알게 됐냐면, 와인 때문이다.

일본 여행 갔을 때 백화점 와인 매대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사이에 처음 보는 국기가 꽂혀 있었다. Moldova라고 적혀 있었다. 그게 몰도바 와인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때는 그냥 이런 나라에서도 와인을 만드나 하는 정도였다.


근데 알고 보니, 그저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숫자로 보는 몰도바

와인 역사 5,000년. 프랑스보다 선배다.

1인당 포도밭 면적 세계 1위. 국토의 4%가 포도밭이다. 나라가 포도밭 위에 올려져 있다.

와인 수출 69개국, 수출액 1억 4,400만 달러(2024). 나라의 4대 수출품이 와인이다.

지하 와인 셀러 200km. 밀레스티 미치(Mileștii Mici)라는 와이너리의 지하 터널에 약 200만 병이 잠들어 있고, 2005년 기네스 세계기록에 등재됐다.

(쉽게 말하면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경부고속도로 따라서 아래 사진 같은 와인 셀러가 지하에 깔려 있다고 보면 된다.)

출처-트립닷컴 & 구글


근데 왜 아무도 모르냐.

비에트 연방 시절에는 생산되는 와인 거의 전량이 러시아로 갔고, 독립 후에도 러시아가 두 차례(2006, 2013) 수입을 금지하면서 서방 시장에 노출될 기회가 없었다.

지금은 미국, EU, 아시아를 개척 중이지만, 한국 마트에서 몰도바 와인을 발견하기는 지금도 정말 쉽지 않다.

내가 일본 백화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아직은 우연히 만나는 와인이다.



우연찮게 지난번 보글 빈야드 메를로를 사면서 몰도바 와인도 같이 발견해서 함께 구매하게 된 와인이다.

동일하게 우리동네 GS어플에서 와인25플러스로 구매했고 9,900원에 구매했다.



와인 이름 : Asconi Uneori Merlot, Moldova.


아스코니는 1994년에 설립된 몰도바의 가족 경영 와이너리다.

Uneori는 루마니아어(몰도바도 루마니어를 사용)로 가끔은(Sometimes)이라는 뜻이고,

라벨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Sometimes, you have to be your own hero.

가끔은, 스스로 자신의 영웅이 되어야 한다.

몰도바라는 나라가 와인 역사와 와인 경쟁시장에서 겪어온 길과 뭔가 묘하게 겹치는 느낌의 문장이면서도 라벨을 보면서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를 주는 문구였다.



향 : 체리가 먼저 뛰어나온다. 검은 옷 입은 블랙 체리가 아니라, 빨간 원피스 입은 체리다. 라즈베리, 크랜베리, 살짝 시큼한 체리까지. 붉은 과일이 줄줄이 나와서 인사한다. 그 뒤로 자두의 달콤함이 슬쩍 깔리고, 아주 희미하게 흙냄새 같은 게 코끝을 스친다. 화려하지는 않은데, 진솔하게 있는 걸 다 보여주는 타입.



맛 : 과실미가 입안을 먼저 장악한다. 체리, 라즈베리가 혀 위에서 터지는데, 보글 미국 메를로보다 한 톤 더 달콤하다. 과일이 더 잘 익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타닌은 있긴 있는데, 거의 존재감이 없을 정도로 가볍다. 입안에서 걸리는 게 하나도 없다. 산미도 적당히 받쳐주고 있어서 단맛이 느끼해지지 않는다. 뒷맛이 군더더기 없이 아주 깔끔하다.



미스 페어링

이 와인은 트레이더스 페페로니 피자랑 함께 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미스매치였다.

동유럽의 작은 나라의 와인과 미국의 상징인 페레로니 피자는 솔직히 상성이 좋지 않았다.

페페로니 피자에서 나오는 MSG오케스트라와 엄청난 기름기는 몰도바 와인이 견뎌내기에는 좀 버거웠던 거 같다.


페페로니 자체와는 어울리는데, 이게 미국식 피자로 바뀌니 미스매치였다.


개인적으로는 삼겹살 수육이라던가 볼로네제 파스타, 고다치즈 같이 부드러운 치즈와 함께한다면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와인 자체의 완성도와 가성비는 아주 좋았기 때문에 추천하는 와인이다.





왼쪽 보글와인 리뷰편

https://brunch.co.kr/@rain5623/30


마무리! - 같은 이름, 다른 세계


캘리포니아 27,900원. 몰도바 9,900원.

합쳐도 4만 원이 안 되는 두 병의 라벨 아래에 같은 단어가 적혀 있다.

Merlot


캘리포니아는 3일에 걸쳐 천천히 열리는 와인이었고, 몰도바는 첫 잔부터 다 보여주는 와인이었다. 하나는 기다림의 맛이고, 하나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맛이다. 어느 쪽이 더 좋은 게 아니라, 방식이 다를 뿐이다.

마트 와인 매대 앞에서 조금만 더 살펴보자. 거칠지 않고, 껄끄럽지 않고, 처음 마시는 사람한테도 편안하게 다가오는 품종이 거기 서 있다.


만 원짜리라도 한 병이면 충분하다. 메를로, 한 번쯤 만나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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