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에 만난 사람, 2011년 산 와인

by 리트리버

와인을 고를 때 나는 빈티지는 잘 안 본다. 어차피 빈티지 정보는 너무 방대한지라 알려면 머리 아프니, 그저 라벨디자인과 어떤 포도품종이고 어디서 만들었는지 정도는 본다.


대신 이 와인은 빈티지만 보고 고른 와인이었다.

2011 Vintage


내가 와이프를 처음 만난 해다.

대학 동기가 자기 친구라며 한 사람을 소개해줬다. 그게 2011년이었다. 사귀기 시작한 건 2014년이고, 결혼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지만, 시작점은 2011년 대학교 복도였다.


결혼식을 올린 지 300일이 되는 날, 뭔가 하나 하고 싶었다.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의미 있는 병 하나. 그래서 이 와인을 꺼냈다.




일본 여행 가기 전에 라쿠텐 이치바(楽天市場)를 뒤지고 있었다. 라쿠텐은 일본판 G마켓 같은 곳인데, 와인도 판다. 검색하다가 이 녀석을 발견했다. 니콜렐로 랑게 네비올로 2011. 정가 2,002엔. 그런데 때마침 라쿠텐에서 1,000엔 할인 쿠폰을 뿌리고 있었다.


소계 2,002엔

배송비 698엔

쿠폰 -1,000엔

결제 금액: 1,700엔


한화로 약 1만 5천 원. 2011 빈티지. 이탈리아 피에몬테. 네비올로 100%. 15년 숙성.

일본 여행 갔을 때, 미리 주문하여 호텔로 배송받아서 캐리어에 넣고 한국으로 공수해 왔다.



출처 - 라쿠텐



와인 정보

이름: 니코렐레 랑게 네비올로 2011 (Nicolello, Langhe Nebbiolo 2011)

생산지: 이탈리아 피에몬테

품종: 네비올로 100%

구매 가격: 1,700엔 (세금포함)






네비올로라는 포도품종은?


이름의 유래가 멋있는데 네비올로의 nebbia는 이탈리아어로 안개라는 의미라고 한다. 피에몬테의 랑게라는 지역의 구릉지대는 가을 수확기가 되면 아침마다 짙은 안개가 포도밭을 뒤덮는다. 그 안갯속에서 익어가는 포도라서 네비올로. 13세기 문헌에 처음 등장할 정도로 역사가 깊으며 이탈리아 내에서도 역사가 엄청 깊은 품종으로 대접받는 품종이다.


네비올로는 이탈리아 피에몬테를 벗어나면 거의 자라지 않는다. 재배는 되는데 맛이 안 난다고 한다. 피에몬테의 특정 구릉, 특정 토양, 특정 기후에서만 제 맛을 내는 철저한 로컬 품종이며 한국으로 치면 보성 녹차 같은 개념이다.


간단 테이스팅 노트

향 : 과일이 먼저 치고 나오지 않고 비 온 뒤 산길에서 코끝에 스치는 촉촉한 흙, 낙엽 속에서 산딸기 향이 차분하게 깔려 있고 신선한 커피 로스팅향도 아주 살짝 감돈다.

맛 : 가볍기만 한 게 아니다. 얇은 비단인데 그 아래 짱돌들이 깔려 있는 느낌이다. 15년 동안 타닌을 얼마나 교육한 건지, 벨벳처럼 부드럽고 여왕처럼 품위가 느껴진다.




300일이니 나가서 사 먹을까 했지만, 와이프가 그냥 편하게 집에서 먹고 싶다고 하여 소소하게 준비했다.


버터헤드 루꼴라 샐러드 & 발사믹드레싱

감자버터구이

한우 라구 소스 마팔디네 파스타


1번 타자: 버터헤드 루꼴라 샐러드 & 발사믹 드레싱

루꼴라의 씁쓸한 풀내음과 네비올로의 싱그럽고 촉촉한 흙의 풍미가 같은 언어를 쓰는 사이였다. 이 샐러드의 역할은 입 안 리셋 버튼, Ctrl+Z 같은 느낌이다.


2번 타자: 감자 버터구이

소금보다 백후추를 많이 넣었는데, 네비올로 테이스팅 노트에 자주 등장하는 화이트 페퍼와 같은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서다. 버터를 잔뜩 머금은 감자 위 후추와 네비올로의 산미가 미뢰 세포 위에서 하이파이브한다.


3번 타자이자 클린업: 한우 라구소스 마팔디네 파스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감자튀김을 오뚜기 케찹과 함께 해온 짬밥이 있는지라, 토마토 파스타에서는 설탕을 조금이라도 넣는 편이었는데, 정통 이탈라아 파스타는 설탕이 들어가지 않을 거라 생각해 설탕을 넣지 않았다.

파스타 한 입. 토마토의 산미가 올라온다. 살짝 모자란다. 평소 같으면 설탕을 넣어서 채웠을 빈 공간.

네비올로를 한 모금 마셨다. 단맛이 아닌데도 한우의 육향과 토마토소스의 산뜻함을 멱살 잡고 캐리 해서 올려준다.




마무리 총평


묵직한 타닌과 화려한 아로마를 기대하고 구매한다면 실망한다.

이 와인은 그런 와인이 아니다. 조용하고 우아하지만 줏대 있는 와인이다.


이 와인은 2011년에 만들어져 피에몬테의 어느 창고에서 15년을 조용히 보냈다. 그러다 일본으로 날아가 라쿠텐에 올라왔고, 마침 1,000엔 쿠폰이 붙었고, 마침 내가 그걸 발견했고, 마침 그 해가 나에게 의미 있는 숫자였다.


2011년에 만난 사람은 대학교 복도에서 시작해서, 15년 뒤에 내 옆에서 같이 이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와인은 만들어진 순간 완성되는 게 아니라고 한다. 병 안에서 천천히 변하고, 어느 날 누군가의 식탁에서 열려야 비로소 완성된다고 한다.


사람 사이의 인연도 비슷한 것 같다. 처음 만난 순간이 시작이 아니라, 오래 지나고 나서야 그때가 시작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이 와인 한 병이 20만 원짜리 두 병보다 나은 추억을 만들어줬다. 비싼 게 좋은 게 아니라 와인도, 사람도 나와 맞는 게 좋은 거라는 걸 또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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