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룩 오타쿠 집안의 유자 막걸리
작년 APEC 정상회의, 대한민국은 NVIDIA의 CEO 젠슨황과 삼성의 이재용 회장, 현대차그룹의 정의선 회장, 이 3인의 서울 삼성동 치맥회동을 보고 열광했다. 여기 어디 치킨집이냐면서 난리가 났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이 <깐부회동>에 열광할 때, 2025년 10월 31일 APEC 정상회의 경주 만찬장에서 대통령이 건배를 제안했다. 각 국 정상들이 잔을 드는데, 그 잔 안에 들어있던 것은 와인도 아니고 샴페인도 아니었다.
막걸리였다.
그것도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3천 원에 파는 막걸리.
이 미친 시나리오의 주인공 이름은 배혜정도가에서 나온 '호랑이 유자 생막걸리'다.
이 주인공을 보기 위해, '배혜정도가'라는 이 잘 나가는 회사를 먼저 짚고 넘어가고 싶다.
대한민국 대표 막걸리 '국순당 막걸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국순당 막걸리를 몰라도 괜찮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 여기를 모를 리가 없다. 명절 때 보이는 백화수복 만드는 그 집이다.
이 국순당을 창업한 사람이 고 배상면 회장님인데, 이 분의 인생이 정말 오타쿠스럽다. 평생을 누룩 연구에 바쳤고 호가 '우곡(牛谷)'이라고 한다. 뜻이 뭐냐면 "다시 태어나도 누룩을 연구하겠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보통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면 부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하는데, 이 분은 다시 태어나도 누룩이란다. 이 분의 DNA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누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배상면 회장님에게 자녀가 셋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 배중호 님(현재 국순당 회장)
막내아들 배영호 님(배상면주가 대표)
그리고 딸 배혜정 님(배혜정도가 대표)
말 그대로 이 집안은 대한민국 주류업계의 어벤저스 집안이었던 것이다.
배혜정도가는 2019년에 우곡생주라는 막걸리로 우리 술품평회 대상을 수상한다. 아버지의 호를 딴 막걸리. 이 막걸리는 물을 거의 타지 않아서 걸쭉한 게 특징인데, 우곡생주는 가격이 7천 원~8천 원 정도이다. 막걸리치고는 비싸 보일 수 있지만, 내가 마셔본 감상은 이건 막걸리 라기보다 쌀로 만든 힐링 포션 같은 존재였다.
(우곡생주 리뷰는 나중에 또 적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2024년 배혜정도가에서 새로운 막걸리를 출시한다. 호랑이 유자 생막걸리. 고흥산 유자 원액을 넣고, 자체 개발 누룩으로 빚은 생막걸리. 도수 5%. 가격 3천 원.
처음에는 시장 반응이 미지근했다. 왜냐면 내가 이 막걸리를 2025년 봄에 서울 대형마트에서 사서 처음 마셔보고 다시 재구매하려고 했을 때, 대형마트에 물량이 없었다. 아니, 물량이 적은 게 아니라 취급 자체를 안 하는 매장이 더 많았다. 결국 '데일리샷'이라는 어플로 예약 걸고, 이걸 취급하는 매장까지 원정 가서 겨우 픽업해 왔다. 3천 원짜리 막걸리 하나 마시려고 이 난리를 친 거다. 수요가 적으니 양조장에서도 제품을 만들 의욕이 없었던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 막걸리, 2025년 우리 술품평회에서 저도수 탁주 부문 대상을 수상 받는다. 같은 양조장에서 6년 만에 또 대상을 받아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수상 덕분에 APEC 정상회의 만찬 건배주로 발탁된다. 원래 국제 정상회의 건배주는 와인이나 약주 같은 맑은술이 관례였는데 이번에는 막걸리가 올라갔다.
3천 원짜리 뿌연 막걸리가 각국 정상들 앞에 와인잔에 담겨서 나온 거다. 각국 정상들이 이 막걸리를 들고 건배하는 장면은 대한민국 전통주 역사상 가장 미친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제품: 배혜정도가 호랑이 유자 생막걸리
도수: 5% 원재료: 쌀(국내산), 유자원액 함유 (고흥산)
가격: 3,000원
비고: 2025 우리 술품평회 저도 탁주 대상 / 2025 APEC 정상회의 만찬 건배주
원래 이 막걸리를 처음에 구매한 이유는 라벨에 있는 그림이 내 마음을 또 흔들어 놨다.
일단 위풍당당한 자태로 유자가 노랗게 삽화로 그려져 '나는 유자막걸리요!'라고 외치고 있고 무엇보다 흑백의 선으로만 그려진 귀여운 호랑이가 자기의 궁둥짝과 꼬리를 구매자에게 들이밀면서 뒤로는 새침하게 히죽 웃고 있는 게 내가 여태까지 봐왔던 시중막걸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 참을 수 없는 귀여운 라벨 때문에 손이 먼저 갔다.
빛이 반사되어 가격이 잘 안 보이지만, 롯데마트에서 2,900원에 구매했고 거기에 2개 이상 사면 병당 2,610원으로 말도 안 되는 할인행사라는 스킬도 시전하고 있다.
집 앞에 있는 즉석떡볶이집으로 쳐들어가서 비조리로 2인분 포장해 달라고 말씀드리니, 설 연휴 전날 재료 떨이하신다고 무지막지하게 많이 담아주셨다. 거기에 라면사리 하나 추가. 순대는 다른 분식집에서 따로 사들고 왔다.
떡볶이를 끓이기 시작하면서 뚜껑을 땄다. 일단 생막걸리 특유의 탄산이 뚜껑을 밀어내면서 유자향이 올라오는데 이 향이 타사에서 파는 유자막걸리나 다른 짝퉁 유자막걸리들과는 결이 다르다. 고흥 유자를 코앞에서 손톱으로 긁은 것 같은 싱싱한 향에 코가 먼저 APEC에 입장한다.
첫 모금 마셨을 때는 탄산이 혀를 습격하는데 생막걸리의 살아있는 유산균들이 입 안에서 톡톡 터지면서 '저희 아직 살아있어요!!' 하고 자기 어필을 하면서 그 뒤에 유자의 상큼한 산미가 따라오는데, 시큼한 게 아니라 새콤달콤하다. 유자가 앞에서 문을 열어주고 쌀의 단맛이 뒤에서 레드카펫을 깔아주는 하모니 속에서 이 역할 분담이 미친 게 느껴진다.
떡볶이 한입에 유자 막걸리를 흘려보내니 입에서 유자의 상큼한 산미가 매운맛 위로 살포시 덮이면서, 매운맛을 맛있는 맛으로 변환되는 연금술이 펼쳐진다. 또 분식의 국룰인 떡볶이 국물에 순대와 간을 찍어먹은 후에 함께 하니, 삼위일체 콤보 매운맛 + 감칠맛 + 상큼함이 입 안에서 삼국동맹을 맺으면서 APEC 동맹 자체가 입 안에서 이뤄져 버린다.
우리 술품평회 저도수 대상
APEC 정상회의 건배주
국순당 창업주 따님의 양조장
고흥산 유자 원액. 자체 개발 누룩. 살아있는 유산균. 인공감미료 無.
3천 원
이건 가성비가 아니다. 가격 버그다. 운영진이 가격 패치 들어가기 전에 시도해보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안 그래도 이 막걸리는 온라인에서 구하기도 힘들고, 배혜정도가 공식홈페이지에서는 판매조차도 하지 않는 제품이다. [호랑이 생막걸리]는 온라인에서 팔아도 [호랑이 유자 생막걸리]는 현재 온라인구매가 불가하다.
만약 혹시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이 노랑유자와 호랑이가 보인다면 일단 사보는 거다. 3천 원으로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해보고, 대한민국 전통주의 DNA를 내 혓바닥 위에 올려놓아 볼 수 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