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가 보기에도 정상이 아닌듯한 할머니
엄마는 우리가 내려오면 가족 예배 드리기를 원했다.
찬송가를 불러야 마음이 평안하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아빠도 앉아있길 바랐다. 아빠는 나와 엄마 같은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아빠, 내 동생, 그리고 우리 세 가족, 여섯 명이 둘러앉아 찬송가를 찾아 부르고 내가 대표 기도를 하고 엄마가 읽고 싶은 성경 말씀 찾아 읽고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고 이렇게 가정 예배를 세네 번 드렸나 보다.
사실 우리 남편은 이 상황을 별로 힘들어하지 않았다.
남편도 크리스천이고 가정 예배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었으며 장모님의 병세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못 받아들이고 괴로워하는 사람은 아빠였다.
아빠 눈에는 엄마가 환자가 아닌 그냥 미친 여자로 비치고 있었다. 이런 아빠의 진심을 알았을 때 난 또 한 번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사십 년을 같이 산 아내가 저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워하는데 애석한 시선으로 봐주지 않는 아빠가 싫었다. 아빠는 엄마 없는 자리에서 나에게 화를 냈다. 네 엄마는 토요일 저녁마다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고.
안서방까지 앉혀 놓고 나까지 불러 앉혀 놓고 뭐 하는 거냐고, 이제 그만하라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원장님이 그렇게 말하는데 왜 못 털어 버리는 거냐고.
‘아빠, 안서방은 아빠 생각처럼 거북스러워하지 않아, 지금 엄마에게 힘을 안주는 사람은 아빠뿐이야.’
엄마가 첫 번째 찾았던 정신과 원장님은 아빠의 가까운 지인이었다. 평소 엄마의 성격을 잘 알던 원장님이기에 본인이 약 처방을 해주고 한 소리 세게 해 주면 엄마가 금방 털고 일어날 줄 알았던 것이다.
장마와 폭염이 기승을 부렸던 7,8월 한 여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엄마대로, 아빠는 아빠대로…
엄마는 호전은커녕 더 안 좋아지고 있었다. 평일에 내가 전화를 하면 아프다는 곳이 하나씩 늘어갔다.
등이 너무 뜨거워서 누워 있을 수가 없다.
혀 끝이 아프고 입이 말라 말을 할 수가 없다.
허벅지 안쪽이 덜덜 떨린다. 팔이 떨린다. 파킨슨 병이 아닌지 무섭다.
그럴 때마다 나와 동생이 휴가를 내거나 아빠와 이모가 번갈아가며 엄마의 증상을 봐줄 수 있는 병원을 다 찾아다녔다. 등이 뜨겁다고 하니 관련 증세에 대해 블로그에 써놓은 한의사를 찾아갔고 혀 끝이 아프고 입안이 말라 살 수가 없다고 하니 대학 병원 구강내과를 갔고 파킨슨 병을 걱정하길래 이 또한 대학병원 신경외과를 찾아갔다. 물론 갈 때마다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나마 한의사 선생님이 이게 다 정신적인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니 마음을 편하게 가져보라고 했다. 약도 지어주지 않았다.
언제까지 토요일 아침이면 짐을 싸서 친정에 내려가야 이 생활이 끝날지 한밤 중에 갑자기 화가 치밀고 속상 헤서 서럽게 울기도 하고 남편에게 나 너무너무 내려가기 싫다고 난리도 부렸다. 엄마 때문에 내 일상도 무너졌고 남편도 고생하고 있으며 내 아이도 여름 방학을
방학답지 못하게 보내고 있었다. 기한이 있다면 그때까지 참고 버티겠는데 끝이 보이지 않아 더 괴로워했던 것 같다.
물론 난 착한 딸이었기에 엄마에게 최대한 힘든 내색을 하진 않았다.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누나인 나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의 모습에 미치고 괴롭다는 토로를 하고 애먼 매형만 붙잡고 술 한잔 하며 울곤 했지 엄마에게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그저 피해자였다. 잘못은 천하의 쓰레기만도 못한 사기꾼 들이지 엄마는 선량한 피해자였는데 점점 엄마에 대한 이해와 위로는 줄어들고 가족들도 지쳐갔다.
상담 치료라도 받아보면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가 다닐 수 있는 거리의 상담센터를 수소문해서 몇 분을 만나보게 했지만 그 상담사 중에 한 분이 “어머니께서 종교가 있다고 하시네요. 하나님께 의지하고 싶으시지 저랑은 얘기를 나눠도 도움이 안 될 거라고 하세요. 딸이 하도 가자고 해서 못 이기는 척 오셨다고 하는데 따님이 고생이시네요.”
가족 여행을 가서 명상 치료를 해볼까, 엄마와 단둘이 치유의 숲을 가볼까, 내가 휴직을 하고 내려와서 엄마를 돌봐야 할까, 무엇을 해야 엄마가 지금보다 좋아질까 하는 고민으로 우리는 엄마를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물리적으로 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찾아다녔다.
“이게 되게 이상하네. 내가 그 힘들다는 항암 치료도 열몇 번을 한 사람인데, 어떻게든 살아 내려고 운동도 했고 별짓을 다했잖니, 근데 이 병은 아무것도 내가 하질 못하겠다. 나도 너네 고생하는 거 싫은데…“
병원을 또 옮겼다. 진작에 친정 근처에서 정신과도 두 번을 옮겼지만 호전이 없으니까. 결국 3차 병원을 택했다. 초겨울 추위가 시작된 시기였다. 담당 의사와 몇 마디 나누더니 엄마가 묻는다.
“제가 입원이라도 하면 나을 수 있을까요? 여기도 정신병동이 있나요? 나을 수만 있다면 입원도 괜찮은데.”
엄마는 이 상황에서 빠져 나오려는 의지는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