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중요하지 않다
인생에서 가장 먼저 접하는 바이럴 광고는 바로 동화다.
이 유서 깊은 광고의 목적은, 일명 '결혼 바이럴'이다. 전 세계의 모든 아름다운 공주님은 위기의 끝에 사랑을 얻고, 그 사랑의 끝은 모두 결혼이다. 해피엔딩은 곧 결혼이요, 결혼은 곧 해피엔딩이다. 심지어 이 악질적인 광고는 그 파급력도 대단해서, 내일이면 2021년인 지금까지도 전 세계 소년소녀들을 세뇌시키고 있다.
그런데 '결혼 바이럴'의 대표 격인 신데렐라는, 아마 이혼했을 거다.
생각해 보라. 눈 깜짝할 새에 가정이 몰락하고 유년기를 천대와 무시 속에서 자란 신데렐라는 미안하지만 심리적 결핍에 의한 콤플렉스나 열등감, 불안에 시달리기 쉽고, 과한 집착이나 의존 성향이 있을지 모르고 물욕도 클 것이다. 친구라곤 쥐나 새 정도가 다였으니 사회성도 떨어질 테고, 게다가 결혼을 앞두고 두 언니가 그렇게 되었으니 친정의 지원이나 도움은 꿈도 못 꾼다.
반면 다이아 수저 물고 태어나 어화둥둥 길러진 왕자님은 고작 구두 한 짝으로 인연을 찾겠다는 허황된 소망을 가질 정도로 과하게 낙천적이고 현실 감각 제로다. 심지어 달랑 몇 시간 춤춘 미녀랑 결혼까지 선언할 정도로 '금사빠'에 앞뒤도 없다.
과연 이 둘은 어울리는 짝일까? 안타깝게도 전혀 아니다. 아마 좋아 봤자 '성격 차이'고, 나쁘게 끝나면 왕자의 불륜으로 끝났을 거다. 결혼 관계의 성립이 곧 행복의 보장이라는 것은 동화의 허황된 세뇌에 불과하다.
결혼은 해피엔딩이 아닌, 그저 한 챕터의 엔딩이며 다음 챕터로의 연결고리에 불과하다.
그다음 챕터의 제목은 '가족'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족'이란 단어는 사실 더 이상 필요 없는 개념이다.
지금 이 순간, 전통적인 개념들 중 가장 빠르게 소멸하는 개념이 바로 가족일 거다. 낳지 않아도, 한 집에 살지 않아도, 결혼하지 않아도 될 수 있으며, 심지어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들이 함께 거주하며 꾸려나가는 '대체 가족'이란 것도 있다. 심지어 어떤 가족이냐에 따라, 가'족같은' 가족이 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결국 가족의 존재나 개념도, 가족이라는 이름도, 또 누가 가족인 지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결국 가족에 담긴 의미다. 이름과 관계만 남았을 뿐인 가족은 밥을 같이 먹는 '식구'나, 가족 관계로 이어진 처자식이나 육친, 식솔은 될 수 있어도 '가족'이라 할 수 있을까? 반대로, 소중하고 사랑하는 존재들, 나와 인생의 한 챕터를 함께 하는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함께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관계가 어떻든 그것만으로 '가'능하고 '족'하지 않을까.
지금 필요한 이야기
가족이 사라지는 시대, 따뜻한 가족극을 표방하는 <18 어게인>은 언뜻 시대착오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정반대다. 관계 그 자체만 남아있던 가족이 오히려 그 관계를 탈피하고 관계 바깥에서 다시 진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진정 중요한 것은 관계가 아닌 그 속에 담긴 마음이라는 것을 전한다.
결국 주인공 '대영'의 식구들이- 부부, 부모와 자녀, 그 자녀의 자녀까지- 다시 가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젊어지긴 했지만 사실은 그들의 남편이고 아빠여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18년 간 서로가 자녀, 남편, 아빠라는 관계의 틀 속에 갇혀 '걱정할까 봐', '실망할까 봐', '싫어할까 봐' 서로 감정과 사정을 숨기고 스스로 소통을 단절해버렸다.
이들의 재결합은 관계를 탈피해 가족의 본질로 돌아가는 데서 출발한다. 가족 관계를 벗어나 외부인인 '우영'으로 변화하면서, 대영은 단순히 다정과의 로맨스에서 부부의 본질인 '서로 사랑하는 남녀'로 돌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부모로서의 역할 그리고 자녀로서의 자리로까지 모두 회귀한다.
함께 마음을 나누고 소통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 이 단순하고 뻔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뻔하다는 것은 동시에 보편적이고, 모든 드라마는 대중의 공감과 설득력을 얻어낼 수 있는 보편성에서 출발한다. 뻔한 이야기의 서사적인 변형을 통해, <18 어게인>은 그 어떤 관계일 지라도 서로의 마음은 말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나누지 않으면 함께하지 못한다는 본질로의 회귀를 강조한다.
그렇기에 이 드라마는, 오히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이야기다.
가장 로맨틱한 가족극, 가장 서글픈 코미디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라는 말로, 누군가를 진짜 가족 생각을 하게 만들기는 쉽지 않다. 울리기는 더더욱 어렵다. 부모님 생각하면서 수많은 청소년을 질질 짜게 만드는 중고등학교 수련회도 어두운 밤 캠프파이어까지 피워가면서 겨우 사춘기 학생들의 눈물샘을 건드리지 않는가.
심지어 그 시간이 길어지면 집중도 몰입도 어려워진다. 반항으로 가득 찬 래퍼들을 순한 양으로 만드는 쇼미더머니 <비행소년>도, 젊음으로 가득 찬 대학 축제를 순식간에 울음바다로 만드는 싸이의 <아버지>도 무대가 4분이 아니라 40분이었다면 아무도 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16시간짜리에 심지어 8주를 나눠서 봐야 하는 가족 이야기라니!
가족 얘기란 자고로 뻔한 만큼 보편성도 있지만, 자칫하면 공익 광고 혹은 지루한 설교가 되기도 쉬운 법이다. 게다가 고딩 때 임신해 찬란한 젊음과 온갖 꿈을 다 버리고 부모가 되어야만 했던 이들과 그들의 자녀 이야기라니, 거의 <인간극장>급 다큐멘터리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 <18 어게인>은 서사적으로 '로맨스'와 '코미디'라는 두 장르를 차용해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인다.
가장 로맨틱한 가족극
18년 전 모습으로 회귀한 남편 '대영'과 그의 이혼한 전부인 '다정'의 로맨스는 이 드라마의 주요 라인이다.
둘이 언제 정체를 알게 되며, 어떻게 오해를 풀고, 왜 사랑을 깨닫는지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면서 이 드라마는 시청자를 16부까지 끌어간다. 다정에 대한 우영의 짝사랑(?)은 물론, 정체를 숨긴 대영과 다정의 애틋한 관계성도 매력적. 물론 원작이 2시간 짜리 영화인 데 비해 드라마는 16부작이다보니, 고딩 고우영의 정체가 (당연하게도) 극 후반부에 풀리게 되면서 자연스레 중반부는 루즈한 감이 있다.
그러나 우영-다정 로맨스 서사가 풀리면서 그 빈자리가 조금은 메워지는 편. (중반부는 최일권과 입시비리 사건으로 끌고 가는 부분인데, 에피소드 자체가 뻔하고 클리셰적이라 기본적으로 지루할 수밖에 없다.... 빠른 스킵 추천. 메인 서사 위주로 시청하시길)
특히 이 드라마가 원작을 뛰어넘는 좋은 리메이크가 될 수 있었던 건 서브남주 예지훈 캐릭터에 있다.
<18 어게인>의 경우 '가족의 사랑'이라는 메인 서사의 결과 서브 남주가 함께 가면서 전체적인 플롯을 강화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보통 서브 남주의 경우 메인 커플 서사를 강화하거나 삼각관계로 긴장감을 유발하는 도구적인 인물로서 자주 활용된다. 그런데 이 작품의 경우 예지훈 캐릭터를 필요할 때에 도구적으로도 쓰긴 하지만, 동시에 그의 딸 서사를 통해 가족에 대한 메시지도 던지면서 다방면으로 활용하는 점이 큰 장점이다.
단순히 2시간짜리를 8배 불리는 과정 속에서 분량 채우는 도구로만 사용하지 않은 점이 매력적.
가장 서글픈 코미디
<18 어게인>의 최대 매력은 바로 코미디와 애틋함의 적절한 조화다.
자칫 지루해지기 너무나 쉬운 소재가 설득력과 몰입감을 얻는 것은 중간중간 코미디가 자연스럽게 잘 녹아들었기 때문. 젊어진 대영이 고우영으로 살며 모두를, 특히나 가족을 속이며 그들과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매우 코믹하게 잘 살았다. 특히나 시청자를 잡아야 하는 1-2회에서 적절하게 배치된 코미디가 시청자 유입의 8할일 것. 특히 2부에서 딸 시아의 전자담배를 오해하는 대영, 교사에게 엄마 것이라고 둘러대는 딸, 정체를 숨기는 것도 잊고 다정에게 대놓고 화내는 대영까지 물 흐르듯 이어지는 코미디는 메인 플롯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굉장히 인상적이다.
동시에 이 드라마는 서글픈 애틋함을 통해 시청자를 드라마 속으로 초대하고 메시지를 전달한다.
1화 에필로그 속 예상치 못한 임신에 낙태를 제안하던 대영이 막상 아기가 위급하자 제발 아이만은 살려달라며 오열하는 모습을 통해, 드라마는 회귀 후에도 꿈이 아닌 아이들을 다시 선택하는 대영의 모습에 설득력과 공감대를 더한다. 또 3회, 퍼붓는 소나기에 아이들에게 몰래 우산을 양보하며 뿌듯해하지만, 동시에 차를 태워주는 다른 아빠들의 모습에 씁쓸해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를 단순히 드라마 속 인물이 아니라, 우리네 아빠의 모습으로 보기 시작한다.
<18 어게인>의 전달 방식은 때로는 작위적이다. 클리셰적인 장면도, 대놓고 감동을 유도하는 장면도, 어디서 많이 본 장면도 있다. 그러나 이미 뻔하더라도 그 감동은 여전하다. 때로는 꼰대 아빠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그의 모습을 통해 <18 어게인>은 시청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자녀로서의 자신, 혹은 부모로서의 자신을 돌이켜보게 만든다.
아빠 홍대영뿐만 아니라, 자녀 홍대영의 모습 역시 시청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8회에서 과거 절연을 선언한 아버지에게 히아신스의 꽃말을 바꾸어 말하며 진심을 내비치고, 손자의 경기인 척 자신의 농구 경기에 아버지를 초대해 과거 하지 못했던 말을 전하는 대영의 모습을 통해 드라마는 시청자로 하여금 부모도 누군가의 자녀임을, 그리고 부모의 존재란 무엇인지를 되새기게 만든다.
버스 뒷자리에서 어느새 노약자석에 앉게 된, 부모의 작아진 뒷모습을 비추는 연출은 덤. KBS2 <고백부부> 연출이었던 하병훈 감독의 따뜻한 연출은 이 드라마에서도 빛난다.
팔릴 가치가 있는 드라마
첫 드라마 PD 공채 면접 때 '좋았던 드라마'를 말해보라는 질문을 받았었다. '좋은'의 개념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최대한 무난하게 대답하고자 당시 근래에 가장 '잘 팔렸던' 드라마를 꼽았다. 시청률도 화제성도 높았고, 스토리도 굉장히 짜임새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무난하게 잘 답했다'라고 생각했었지만, 두고두고 생각해보면 그렇게 후회만 가득 남는 답변이 또 없다.
지금 나에게 다시 답해보라 한다면, 어떤 개념에 대한 설득력이 있는 게 진짜 잘 만든 드라마이자 팔릴 가치가 있는 드라마라고 답할 것이다. 어떠한 가치나 개념에 대한 설득력을 가진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단순한 재미는 물론, 보편성과 감동까지 얻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엄마들 이야기어도 <펜트하우스>, <위기의 주부들> 같은 킬링타임용 드라마를 보고 삶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거나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은 잘 없지만 (범죄에 대한 경각심이나 인권에 대한 생각은 오히려 감소할 듯) , 반대로 <고백부부>, <빅 리틀 라이즈>를 보고 우리는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지 않는가. 설령 비교적 덜 팔렸더라도, 팔릴 만한 가치가 있는 드라마다.
<18 어게인>은 팔릴 가치가 충분히 있는 드라마다.
2021년의 당신에게 이 드라마를 보길 추천하며, 곁의 가족들과 가족같은 사람들을 돌이켜 보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