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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페베 Jan 11. 2021

중드, 내 뇌를 망치러온 나의 구원자

중드 때문에 중국어 공부 시작한 ssul 

중드 시청 6개월차, 드디어 HSK 시험을 등록했다. 책도 영차영차 집에 오고 있다. 뭔가 벅차올라서, 직전에 작성했던 <호의행> 기대평에서 중국어 공부에 관한 부분을 떼와 따로 하나의 글로 작성하기로 했다. 


나는 대학에서 유럽어 중 하나를 전공했다. 

하필 대학까지 가서 언어를 공부하기로 맘 먹은 것은 첫째로 내 성적이 그 과에 맞았으며, 둘째로는 영어 하나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엔 이 헬조선이 너무 혹독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대학 입학과 동시에 알파벳부터 공부를 시작해 어느새 번듯한 자격증까지 손에 쥐었다. 그런데 뇌에서 관리하는 언어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고, 동시에 영어 수준은 급격히 퇴화해버렸다. 애석하게도 과거 미국 고딩 수준의 영어 사용자에서, 2개 외국어 구사자지만 둘 다 초딩 수준인 사람으로 내려앉았다(?).

그런데 이제 중국어 공부까지 하게 되었으니, 3개국어를 유치원생 수준으로 구사하는 사람이 되게 생겼다. 벌써부터도 작문할 때 세 가지 언어가 동시에 나와버린다.  

뇌 언어기능이 뒤죽박죽 섞인 기분이다.


이 일련의 사태는 요약하자면 모두 중드 <호의행>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다.

올해 언제 방영할 지조차 모르는 '예정작'에 불과하지만, 방영할 그날을 기다리며 열공중이다. 심지어 여태껏 중맹이었던 주제에 감사히도 파파고 선생님 덕분에 이미 원작 소설 <이합화타적백묘사존>을 진강문학성에서 중국어 원문으로 완독까지 했다. 또 지난 6개월 동안 각종 번역기와 사전을 동원해 어찌저찌 드라마와 예능들을 봐왔다. 그럼 도대체 왜 훌륭한 AI 번역기 선생님들이 브랜드별로 있는 이 좋은 시절에, 굳이 왜 나서서 중국어 공부를 하냐고? 


기껏 존버의 끝을 달려 <호의행> 방영을 했는데, 막상 영어 자막조차 없을까봐 혹은 구릴까봐 걱정돼서다. 

왜 하필 <호의행>을 기다리냐 물으신다면, 이전 글을 참고해주시길. (https://brunch.co.kr/@rainbowofspb/27 야, 너두 <호의행> 존버할 수 있어)


중드 고장극, 특히 선협물에서의 영어 번역은 정말 끔찍하다. 한자문화권의 경우 각 한자가 가진 미묘한 뜻의 전달이나 무협용어의 번역이 굉장히 쉽지만, 영어는 그렇지 않다. 굉장히 단순해지거나 유치해지기 일쑤다.

일례로 사존, 사부, 스승, 선생은 모두 다른 느낌을 가진 단어지만 영어권에선 master로 통일이다. 보통 대인, 대사, 주인, 종주, 장문, 당주, 궁주까지도 '마스터'의 범주에 포함된다. 뜻 파악은 맥락따라 셀프. 원문으로는 간지 좔좔 흐르는 법력, 영력, 도력 등의 용어는 magic power이라는 심히 유치뽕짝한 단어로 바뀐다. 어검, 내단(금단, 선단), 영핵(영류)나 무기 이름 같은 복잡한 단어는 초월번역 당하는 게 예삿일.

이 짤은 물론 장난이지만, 기계번역 영자막의 경우 절대 웃을 일이 아니다... 출처: tumblr suibian subs 

심지어 한자 특성상 뜻과 음이 공존하다보니, 번역이 곧 스포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호의행> 주인공 '묵연'의 무기 이름은 '불귀(不歸)'다. 이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한자에 담긴 뜻과 스토리의 서사가 합쳐져, 자신의 사존인 '초만녕'에 대한 묵연의 후회, 그리움, 애증 등을 상징한다. 한자문화권에서는 굳이 별 설명 없이도 이 모든 내용이 직관적으로 이해되고 여운이 짙게 남지만 이게 영어로 번역되면 어떨까. 음차대로 번역돼도 웃기고, 'No Return'으로 번역되면 그 자체로도 스포다. 


잔뜩 구리다고 욕해놓았지만 사실 영자막이라도 감지덕지, 있어주시면 감사할 지경이다.

자막조차 없다면 컷별로 구글 번역기로 사진 찍고 자막에 색칠해가며 인식시켜서 이해해야 하는데, 아무리 덕후는 나노 단위로 핥는 게 일상이라지만 그거야 일단 3순환 정도는 돌렸을 때 얘기다. 그렇다고 그림책 보는 아기들마냥 화면만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실제로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기에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이 개봉했다는 소식을 듣고 최애 시리즈의 최애 편을 보겠다며 영어도 못하는 주제에 무작정 영화관에 갔던 적이 있다. 분명 원작 내용을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한 채 화면만 봤던 그 두 시간이 재밌으면서도 너무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분명 <호의행> 방영하면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옆 자리 미국인들이 웃고 울고 탄식할 때 나 혼자 멀뚱멀뚱했던 그때의 소외감과 어색함이란! 물론 그 덕에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한 덕에 영자막, 영어듣기라도 있어주면 감사하다. 


심지어 드라마도 맘대로 못 보는데, 방영 기간 내내 배우들의 각종 예능, 인터뷰, 비하인드, 자체 콘텐츠가 잔뜩 쏟아져 나올텐데 그것조차 못 알아듣는다. 덕후가 아닌 사람에게는 '드라마도 못 보면서 다른 건 봐서 뭐해' 싶기에 꽤나 어색하겠지만, 원래 덕질이란 콘텐츠가 끝나는 그 시점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1차 콘텐츠는 기본이요, 그 이후에 각종 파생 콘텐츠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것이 덕후다. 그렇다고 중국어 존잘님들이 번역해 주시기만 오매불망 기다리자니 내 목이 빠져버려서 바닥을 뒹굴까봐 심히 염려된다. 


외국 콘텐츠에 관심을 갖다 보니, 자연스레 존경하게 되는 인물이 바로 배우 김혜수다.

그녀는 읽고 싶은 외국 책이 있을 때마다 개인 번역가를 고용해 번역을 의뢰한다고 한다. 훌륭한 문학과 새로운 정보에 대한 그녀의 지적 열망이 얼마나 크고 동시에 올바른 지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진정 멋진 여성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나는 혜수 언니처럼 돈이 많지도 않고, 그렇다고 번역을 부탁할 친구도 없다. 

어쩌겠는가. 내가 번역을 할 수밖에!


한 가지 좋은 소식은 (01월 11일자) 텐센트 위티비(WeTV) 어플에서 한글자막이 지원되기 시작했다는 것. 

물론 기존 작품에 달리기 시작한 거라, 다른 작품들이나 앞으로 풀릴 신작들에도 한자막이 달릴 지는 미정. 다만 내일모레 공개 예정인 <아적소확행>의 티저와 뮤비에 한글자막이 달려있는 것을 볼 때, 앞으로 점차 한글자막 지원 비중이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소소한 기대를 해본다.


모두들 중맹탈출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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