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배속으로 드라마 보기, 나의 길티 플레저에 관하여
이젠 무엇이든 배속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시대다.
이미 학창시절 인강 듣던 때부터 버튼 하나에 속사포 랩으로 강의를 뱉던 수많은 강사들을 경험해본 밀레니얼 세대에게 배속은 필수불가결한 기능이다.
유튜브도, 웬만한 OTT 플랫폼들도 전부 자체적으로 2배속까지 지원하고, 크롬 확장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넷플릭스를 비롯해 그 어떤 동영상도 마음껏 몇배속이고 빠르게 올릴 수 있다.
애초에 '노동요'랍시고 노래조차 2배속으로 듣는 시대인데, 영상이라고 배속을 돌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오죽하면 야한 동영상 빼고는 전부 배속을 돌리는 게 일상적인 시대가 되었다.
드라마도 배속 기능을 피해갈 수 없다.
다시보기와 IPTV, OTT가 등장하면서 10초 넘기기, 스킵 버튼이 등장하더니 이제 배속 기능마저 추가되면서 드라마는 이제 거의 젤리 슬라임처럼 시청자의 손에서 마음껏 주물러지고 있다. 애초에 한 편에 60분씩이나 되는 영상물인데 배속'당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심지어 나처럼 드라마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사람들에게조차 배속은 매력적인 기능이다. 나의 길티 플레저 중 하나가 '드라마 배속으로 보기'다. 아닌 걸 아는데도,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드라마를 업으로 삼으려는 나에게도 배속은 매혹적일 지경인데, 드라마를 통해 정말 순수한 즐거움만을 찾는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배속은 빠른 시간 안에 쾌락을 선사하는, 얼마나 좋은 기능이겠는가.
특히 한 번 통자바지를 입어본 사람이 스키니 청바지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배속의 맛을 본 사람은 정속으로 돌아가기 힘들다. 30분이면 다 보던 에피소드가 한 시간으로 늘어나고 인물의 걸음걸이도 느려지고 쓸데없는 인서트 컷이나 감정 잡는 장면은 두 배로 분량이 늘어난다.
한 마디로, 정속은 지루해진다.
그러나 드라마 제작자 입장에서 보면, 배속은 드라마의 적이나 다름없다.
20년 가까이 공중파 드라마 PD로 일하고 계신 선배님께서 입이 닳도록 "배속이 드라마를 망치고 드라마 판을 망친다"며, 본인은 그 장면 하나 하나를 만들기까지 어떤 노력이 들어갔는지 알기에 더욱이 그 버튼을 누르기 싫다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난다.
끓이자마자 떠먹는 김칫국 같은 김치찌개보다 다음 날 아침까지 뭉근하게 지져진 뒤 먹는 김치찌개의 깊고 진한 맛이 다른 것처럼,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모든 장면, 감정과 대사, 음악에는 그에 맞는 속도가 정해져 있다.
그리고 그 최적의 속도는 당연히 연출과 편집자, 그리고 음악감독이 이미 '정속'으로 정해둔 바로 그 속도다. 아무리 라면 면발이 취향을 탄다고는 하지만 봉지에 적힌 시간이 라면 회사가 의도한 가장 최적의 맛인 것처럼, 드라마 역시 소비자별로 최적의 시간은 다르겠지만 정해진 러닝타임에 맞춰진 속도가 가장 의도에 가까운 맛을 전달한다.
같은 표정과 감정에도 전달되는 시간과 곱씹는 시간에 따라 전해지는 감정의 결이 다르다.
특히나 소설처럼 명확하게 감정을 콕 집어 알려줄 수 없는 드라마에서는 무엇보다 표정, 연출 분위기, 음악이 시청자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요소다. 그런데 배속되는 순간 당연히 이 셋 중 어느 것도 제대로 기능하지 않으니 당연히 시청자는 인물의 감정을 파악하기 힘들어진다. 물론 스토리라인을 통해 대충 감정선을 예측은 할 수 있겠지만, 섬세한 심리는 전달되지 못하니 자연스레 몰입도도 떨어진다.
특히 자막을 읽어야 하는 해외 드라마라면? 연출은 물론이거니와 인물 얼굴 볼 시간도 없이 휙휙 지나가는 자막을 읽기도 바쁘니 차라리 대사를 음미할 시간이라도 있는 대본집을 읽느니만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같은 '이별의 상황에 눈물 흘리는 여주인공' 이더라도, 단순한 '슬픈 표정, 눈물 한 방울'과 '후회와 애증이 뒤섞인 표정, 결국 끝내 참지 못해 떨구는 눈물'은 극 중에서 갖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이 의미 차이에 따라 캐릭터 분석과 인물의 감정선 해석은 완전히 달라진다. 전자의 경우 여주인공이 현재 연인에게 미련이나 원망이 남았는지,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는지 느낄 수 없고 당연히 미래에 이 여주인공이 어떻게 행동할 지 예측하는 것도 어렵다.
그런데 2배속을 하면 전자와 후자는 구별할 수 없어진다. 울기 전의 미묘한 표정 변화도, 눈물이 떨어지는 속도도 다르고, 배경에 흐르는 감성적인 발라드가 다람쥐 목소리의 EDM 뽕짝이 되어버리니 미묘한 감정선 분석은 차치하고서라도 몰입감부터가 확 다른 것은 당연지사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드라마를 보며 배속 버튼을 놓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장면을 음미할 시간도 없이, 주인공들이 <앨빈과 슈퍼밴드>의 잉잉대는 다람쥐 목소리의 래퍼들로 변하고 마치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걸어다니는데도 계속 배속을 누르는걸까?
아마 무엇보다도 넘쳐나는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볼 것은 많은데 막상 볼 시간이 적어서가 아닐까.
넷플릭스 하나만 두고도 매 주 수십 편의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이 전 세계에서 쏟아진다. 그런데 볼 콘텐츠가 어디 넷플릭스 하나만 있나? TV 예능도 봐야하고, 유튜브도 보고싶고, 다른 OTT에도 재밌는 것들은 수도없이 많다. 또 트렌드를 따라잡으려면 좋아하는 것 말고도 인기있는 것도 봐야 한단다. 콘텐츠를 볼 정량적 시간 자체가 부족하다.
그러니 당연히 60분씩이나 되는 드라마를 느긋하게 정속으로 즐기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2배속 하면 같은 시간에 2편, 3배속하면 같은 시간에 3편을 볼 수 있는데 1편밖에 못 보는 정속은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심지어 유튜브에 자극적이고 웃기고 재밌는 콘텐츠들이 넘쳐나는 마당에, 즐겁자고 보는 드라마에서 갑자기 '예술한답시고' 감정선 넣은 장면에 몇 분씩 인물들이 오열하는 장면을 보면서 나까지 축축 처지고 싶지는 않은 마음은 당연하다.
또 유튜브에 넘치는 것이 '드라마 클립'이 아닌가. 자고로 '클립 영상'이란 60분짜리 드라마에서 중요한 장면들이나 클라이맥스만 쏙쏙 뽑은 것들이다. 산적꼬치에서 맛있는 고기, 햄, 맛살을 담당하는 장면들이다. 그렇게 맛있는 것들만 골라먹다가, 이제 통째로 드라마 꼬치를 먹으려 하는데 중간중간 연결고리로 꽂힌 파와 고사리까지 먹어야 한다니 당연히 2배속으로 손이 갈 수밖에 없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다.
드라마가 시대의 필요를 반영하는 매체라고는 하지만, 단순히 콘텐츠 내적으로만 반영할 수는 없는 법이다. 콘텐츠 외적으로, 소비되는 방식 자체에도 시대의 요구가 반영되어야 한다. 웹드라마, 숏폼 드라마, 클립 드라마가 그 예다.
그러나 마라탕이 유행이라 한들 설렁탕 맛집에서 다대기 대신 마라 소스를 넣을 수는 없는 법이듯이, 드라마 제작자는 언제까지나 기본적인 것들을 유지해야 한다.
가장 최적의 속도에 맞춘 연출과 편집을 통해 정도(正道)를 제시하는 것은 불변하는 제작자의 임무다.
소비자가 몇 배속으로 보든 그것은 소비자 개인 자유의 영역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물론 소비자도 정속으로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이미 우리는 배속이라는 아담의 사과를 베어물어 버렸기에... 정속으로 보길 '권유'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