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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페베 Oct 09. 2020

한드에도 자막이 필요해

한국 드라마에 일부러 '1인치의 벽'을 세우는 이유 

OTT 플랫폼 홍수 시대에, 다른 OTT 플랫폼 말고 오직 넷플릭스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기능이 바로 '원어 자막', '폐쇄 자막' 이다.

설명하자면, 한국 서버에서 한국 드라마를 서비스하는데도 한국어 자막을 제공하는 기능이다.

봉준호 감독은 골든글로브를 수상하며 자막을 '1인치의 장벽'이라 표현했다. 도대체 그럼 왜 한국어에도 이 장벽이 존재하는 것일까?


기존의 용도는 청각장애인용 자막이다. 

그래서 군데군데 보면 일반적인 해외 드라마의 자막과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단순히 대사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와 화면으로 구성된 영상에서 '소리'가 의미를 갖는 모든 순간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대본의 지시문까지 그대로 보는 셈이다. 

<보건교사 안은영>(넷플릭스) 의 한 장면. 툭툭 건드리는 효과음을 설명해주고, 매켄지와 은영이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자막이 삽입됐다.

예를 들어, A인물이 분노한 상황에서 걸음을 걸을 경우 [발을 쿵쿵 구르며] 라는 자막이 삽입되거나, 벨소리가 울릴 경우 [벨소리가 울린다]는 자막이 들어간다. BGM이 특정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무언가를 암시할 경우에도 [웅장한 음악] 등의 자막이 붙는다.

은영의 대사임을 알려주는 괄호. 역시 넷플릭스의 <보건교사 안은영> 의 한 장면.

또는 두 인물의 대사가 겹치거나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의 말꼬리를 자를 경우에도 [준표] [잔디] (<꽃보다 남자>의 예) 와 같은 식으로 인물의 이름을 넣어 누구의 대사인지 알려주기도 한다. 때로는 이 기능 때문에 원치 않는 스포를 당하기도 하는데, 바로 인물의 이름이 곧 복선일 경우다. <응답하라 1994>의 경우는 한국 자막은 없지만, 영어 자막에서 인물의 실명을 이렇게 공개해버린 탓에 의도치 않게 가장 큰 스포를 해버리는 케이스.


넷플릭스가 폐쇄 자막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미국 연방통신위원회 FCC(Federal Communications Commission)의 시청각장애인의 미디어접근권 보장을 의무화한 미 연방 시행령(CFR) 때문이다. 2012년 8월 미 FCC는 온라인 동영상 및 인터넷 TV 서비스로 제공되는 동영상 콘텐츠에 대해서도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 삽입을 의무화했는데, 이에 따라 넷플릭스는 비디오 스트리밍에 자막을 제공하지 않아 소송에서 패소하기도 했다. 


더불어 해당 시행령에 따라 미국에서 제작되는 콘텐츠는 물론, 미국에 수출되는 타 국가의 콘텐츠에도 장애인 방송 기능을 갖추는 것이 의무이다. 이는 청각장애인용 폐쇄 자막 뿐만 아니라,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 해설 기능까지 포함한다. 때문에 <킹덤> 의 경우 청각장애인용 한국어 폐쇄자막(CC)는 물론 한국어 화면해설까지 동시에 제공된다. 


심지어 미국 제작이나 미국 수출용이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국내에서 생산 및 유통된 콘텐츠나,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아닌 작품의 경우에도 종종 시청각장애인용 서비스를 제공한다. 화면해설과 폐쇄자막을 모두 제공하는 <미스터 션샤인>과 <비밀의 숲>, 폐쇄 자막만 제공하는 <또 오해영>이나 <슬기로운 감빵생활>이 그런 예. 

넷플릭스에서 <도도솔솔라라솔>(KBS)를 볼 때의 모습. 한국어 폐쇄자막을 지원한다. 같은 드라마를 서비스하는 공중파 3사의 OTT 웨이브에는 이 기능이 없다.

나는 비장애인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한드를 볼 때 종종 한국어 자막을 띄워놓고 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사를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다.

기본적으로 배우의 대사 전달력이 좋지 않은 경우 자막이 필요하다. 신혜선 배우와 같이 귀에 때려박는 발성과 대사 전달력을 가진 배우들의 경우 자막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사투리가 섞이거나 발성이 탁하거나 발음이 새는 경우는 다르다. <비밀의 숲 2>의 우태하 역과 같은 경우 드라마 특성 상 정확한 대사 전달이 중요한데, 종종 새는 발음과 사투리로 인한 낮은 전달력으로 '알아듣기 힘들다'는 평이 많았다. 이런 경우 자막은 좋은 도우미가 된다. <응답하라 1994>와 같은 경우 표준어 구사자에게는 자막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빈지 뷰잉의 시대에 더 이상 콘텐츠는 조용한 집 안 소파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다. 

이제 콘텐츠는 시끄러운 대중교통 속에도, 차 소음이 넘치는 길 위에서도, 시종일관 음악이 나오는 카페에서도 '보여질' 준비를 해야 한다. 지하철에서 한 번이라도 드라마를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열차가 내는 굉음 속에서는 도무지 대사를 알아듣기 힘들다. 

기본적으로 자막 시스템이 존재하는 예능이나 다큐와 달리, 오직 인물의 이미지와 소리로만 모든 것을 설명하는 드라마는 소리 하나하나의 기능이 천지차이다. 요즘 드라마는 그래서 대사보다 화면으로 보여지는 행동에 우위를 두는 편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대사와 배경음을 잃은 드라마는 갑옷만 차려입고 맨주먹으로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와 같다.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처럼 '말맛'이 중요한 드라마나 <비밀의 숲>처럼 대사 하나하나의 의미가 중요한 드라마는 특히나 그 힘이 약해진다.

'언제 어디서나' 라는 요즘 콘텐츠의 신조에 발맞추려면, 한국어 자막은 이제 필수템이다.


사실 시청각장애인용 서비스가 넷플릭스만의 특수한 기능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TV로 보고 있는 그 TV 프로그램에도 보이지는 않을 뿐, 청각장애인용 자막이 깔려있을 수 있다.

대부분의 비장애인들은 모르지만, 인터넷 편성표를 확인해보면 [해][자] 가 붙어있는 프로그램들은 장애인용 서비스를 이용할 경우 화면해설이나 폐쇄자막을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 의무적으로 특정 비율 이상의 프로그램에 시청각장애인용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프로그램 인트로에 '장애인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고지하는 것이 바로 이 서비스의 제공 여부에 대한 것이다.

결국 한국 방송사에 이 폐쇄자막 데이터가 없지 않다는 것이다. 


OTT 시대의 패권을 놓고 수많은 플랫폼들이 피터지는 경쟁을 하고 있는 시점에서, 넷플릭스 혼자 한국 드라마의 폐쇄자막을 제공한다는 것은 그 의의가 크다.

단순히 시청각장애인의 방송 접근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용자가 '보기에 편한' 플랫폼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떤 시청 환경에서라면 같은 <청춘기록>이라도, <도도솔솔라라솔>이라도 굳이 자막 기능 없는 티빙이나 웨이브가 아닌, 넷플릭스로 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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