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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토끼 Jan 17. 2017

#14 이 시대의 고민

정이현의 '상냥한 폭력의 시대'와 '월든'을 읽고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을 꾸미지 않았고 적나라했다. 정이현의 ‘상냥한 폭력의 시대’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이 책을 여러 번 보기 전에는 이 안에 담긴 의미를 단번에 헤아릴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아무것도 아닌 것/ 우리 안의 천사/ 영영, 여름/ 밤의 대관람차/ 서랍 속의 집/ 안나 등 7개의 단편소설이 실린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무언가 결여된 사람들이다. 원래 그들이 그런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우리의 모습과도 같으며 이 시대의 별로 달갑지 않은 속살일 것이다.

등산을 하거나 절에 가보면 조그마한 돌멩이가 옹기종기 쌓인 ‘소원탑’을 만난다. 또, 생일 케이크에 꽂힌 초의 촛불을 불거나 어쩌다 밤하늘에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았을 때도 소원을 빌어야만 하는 타이밍이 온다. 그러나 설렘, 희망 등의 감정이 함께하는 그 타이밍에 쉽게 소원을 빌지 못하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어떤 소원을 빌어야 할지 몰라서 혹은 딱히 소원이 없어서. 아니면 소원 같은 거 빌어보았자 인생은 생각대로 되지 않으니까, 그게 바로 나다. 나 또한 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 주변의 어떤 이들도 이 책의 한 챕터를 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동시대인의 보폭으로 걷겠다는 마음만은 변한 적이 없다’는 작가의 말은 이렇게 지켜짐이 증명되는 걸까.

사람은 누구나 등에 보이지 않는 짐을 지고 살아가는 법이다. 나이를 먹어도, 상황이 변해도 그 짐은 무게를 달리할 뿐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속지 않은지는 꽤 되었다. SNS에는 저마다 행복을 자랑하기 여념 없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나마 자신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도 있겠거니 생각한다.(부정적인 관점인 것은 인정) 하긴, 그것 또한 잘 살아가는 방법이다.

표정에 근심이 없거나 인생이 아주 흥미진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만나보질 못했다. 한 번은 누구에게든 관대하고 친절해 항상 여유 있어 보이는 내 또래의 남자를 본 적이 있었는데 머지않아 고된 일로 얼굴에 어둠이 드리웠다.

누군가에게는 성가신 고민이 다른 이에게는 배부른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그렇게 각자가 느끼는 고민의 무게는 주관적이며 상대적이다. ‘상냥한 폭력의 시대’에 마지막 이야기로 실린 ‘안나’에 나온 화자는 아이가 영어유치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큰 고민이다. 그러나 영어유치원에서 시급 7천원의 보조교사로 일하는 ‘안나’의 입장에서 진정 마음 속 깊이 화자를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만한 경제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부러운 일이자 영어유치원 같은 것은 애초에 보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초, 중, 고를 다닐 때는 학교라는 사회가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의 집합소. 물론, 각자 배경이 다르지만 정해진 교복을 입고 길지 않은 머리를 유지하는 것은 너도나도 같았다. 그러나 대학교는 사정이 조금 달라진다. 국립대 한 학기 200만원이 채 되지 않았던 학비를 내는 방식은 각자 달랐다. 자취를 하는 유형이 다른 것도 마찬가지. ‘가진 이’들을 다르게 느낀 것은 이때부터였을 게다.

동생과 함께 어울렸던 두 명의 대학동기가 있는데 둘은 성적이 상위권으로 비등비등했다. 그러나 한 명은 학기가 지날수록 외모나 스펙이 발전해갔고 다른 한 명은 공무원 준비를 할지 취업을 할지 꽤 오랜 기간 고민했다. 전자는 서울의 한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부모님께서 사업이 잘 풀려 자취비용 등 넉넉한 지원을 받고 있어 인생이 잘 풀리는 듯 보인다. 반면, 후자는 방학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졸업 후에는 학교에서 인턴을 하다 이제는 공무원으로 진로를 정해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생’이 되었다. 나는 이들이 서로 만난 20살에는 같은 출발선상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니, 후자였던 아이가 외모적으로는 더 빼어났다. 그러나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만 했던 아이는 자랑할 만한 스펙을 쌓지 못했고, 가정환경이 넉넉했던 아이는 방학마다 외국을 다니고 외모도 가꿀 수 있었다. 후자인 아이가 성격이 긍정적이고 구김살이 없는 것은 배경에서 얻은 덤이 아닐까 생각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가 미국 월든이라는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자연에서 생활하는 동안 인간의 본질을 고민하며 써내려간 ‘월든’을 보면,

의식적인 고행도 내가 매일 목격하는 마을 주민의 힘겨운 삶의 모습에 비한다면 그리 비현실적이거나 놀랍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헤라클레스의 열두 가지 노동도 내 이웃이 치르는 고생에 비하면 사소하기 이를 데 없다. 헤라클레스야 열두 가지 고역만 치러 내면 되었지만, 내 이웃은 괴물을 사로잡거나 그 목을 베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노동을 끝낼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라고 쓰인 부분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과 고난은 인간의 운명은 아닐지 의문을 가져보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이제는 앞서 내가 언급했던 여러 불안과 근심에 관해 잠시 생각해 보자.
그런 걱정이 정말 필요하기는 하고, 또 적어도 주의를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기는 한 것일까? 오늘날 우리는 문명의 한가운데서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얻을 수 있을지 알고자 한다면, 원시적인 변경 지역의 생활 방식을 따라 해 보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된다.

라고 언급하며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를 제시한다. 고민없이 얘기한다면 인간의 삶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의·식·주라는 쉬운 대답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무대가 현대 사회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의·식·주에 대한 쉬운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 우리가 불안과 고민을 떠나보내자고 TV에 나오는 '자연인'처럼 되기는 어렵지 않은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주거비에 허덕이고, 자녀 양육에 난항을 겪고, 노인들이 고독사 하는 등의 문제들은 현대 사회가 가진 이면이고 한편으로는 ‘상냥한 폭력의 시대’가 수긍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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