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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토끼 May 15. 2017

#23 관둘까

-쿨하게 사직서를 내지 못하고

"사표를 냈다"

는 문장으로 글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사표는 아직 서랍 속이다.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한 번에 답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이 뭐길래"라는 말을 들어도 마찬가지일 테다.

사정을 아는 가까운 사람들은 진즉 관두라고 얘기해줬지만, 이 자리에 앉아있는 내 마음이 우르르 무너질 때쯤 사표를 썼다. 일이 무섭고, 입이 열리지 않고, 긴장과 불안으로 심장의 두근거림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오늘에서야. 

모든 게 다 자신 없어 현실도피만 했나 보다. 텅 빈 통장 잔고와 몇 줄 쓰지 못할 이력서로 지난날이 요약된다. 그러고 보니, 스트레스와 부담감으로 일거리를 미뤄두고 시간이 급급해서야 해결해왔던 것 같기도 하다. 돈을 마구 써댄 것도, 자기계발을 못한 것도 다 이 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함이었다며 혼자 그럴듯한 변명을 덧붙인다.

모든 끝맺음은 참 어렵다. 용기가 부족한 나에게는 특히나. 사직서를 내면 분명 큰소리가 날 것만 같다. 큰 소리를 듣는 것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다. 아마 회사에서는 갑자기 비상이 되어 나의 퇴직에 대해 논의하겠지? 그리고... 아무도 그동안 답답했던 내 마음에 대해서는 관심 없을게다. 그래, 나도 말하지 않으련다. 

'병원에 며칠 입원했으면, 회사가 없어져버렸으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할 만큼 일을 관두는 게 내게는 큰 일이다. 그러나 관둔다고 말하는 것보다 매일 출근하는 것이 더 무섭게 되어버렸으니 겁 많은 나는 조금 덜 무서운 쪽을 택해야겠다.

내년 2월, 결혼 날짜를 잡았다. 관두라고 말하던 동생이나 친구도 조금 참으라고 했다. 직업 없는 여성은 능력 없어 보이고, 직업명이나마 괜찮은 지금에 머무르라는 말이다. 나도 제발 참을 수 있으면 좋겠다. 고민하는 나는 인질- 회사에서 곧 결혼을 앞둔 내가 관두지 못할 걸 뻔히 알고 마구 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 온갖 비꼬는 말들과 내 능력을 의심하는 질타는 그와 관련된 의도된 괴롭힘? 의혹이 인다. 물론, 망상이다. 이미 머리는 이성의 경계를 넘었다. 퇴사를 고민하다 참는 쪽으로 이성적인 판단이 기울자 멘붕 상태가 된다. 고개를 숙이니 심장은 빠르게 뛰고 귀는 멍멍했다. 이쯤 되면 심리적 불안을 그 무엇도 붙잡지 못하겠다 싶어 사직서 양식을 다운받아 간단한 몇 가지를 채워 썼다.

일을 그만둔 뒤의 미래를 계획해봤다. 상상도 섞는다. '모든 게 잘 될 것'이라는 자기암시도. 

1. 지금까지 했던 일과는 전혀 다르고 간단한 일을 구한다 2. 돈을 모은다(결혼비용) 3.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학점은행제로 따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한다(중간에는 결혼, 적당한 시기에 퇴사) 4. 숨겨왔던 천재성을 발휘해 단기간에 합격 5. 공무원이 된다 6. 1~2년 일하고 아이를 낳는다. 7. 아이는 부모님께서 돌봐주신다. 8. 열심히 벌어 재테크를 한다. 9. 재물운이 좋다는 나의 사주에 따라 대박을 터트린다. (글 쓰는 것은 취미로만 한다) 10. 나도 즐겁고 모두 즐겁다.

위 상상은 자아 실현(작가가 되는 것)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전제다. 꿈이 삶의 지표라고 박혀있던 생각을 빼내야 하는 건가.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스트레스를 받고 그것을 풀기 위한 소비와 여가에 흥청망청하는 생활이 반복될 것 같다. 그러니 먹고사는 것보다는 길게 보아 꿈에 다가간다고 여겼던 이 일을 관두고, 평생 먹고 살 걱정 없어뵈는 공무원이 되는 것은 인생 전반으로 보아 무척이나 효율적인 대안이다. 숨 막히는 공무원 시험에 도전해야 하는 것만 빼면. 

전남자친구와 헤어지고 훨씬 업그레이드된 생활이 펼쳐지고 몇 만 배는 더 좋은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난 것처럼 일을 관둔 미래도 당장엔 깜깜하지만 점차 원했던 길을 밟아갈지 모른다. 하긴, 오래 버텨왔으니까. 스스로에게 새로운 기회를 줘 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사직서는 내일 내야겠다. 혹시 모르니깐.

내일이 모레가 되고 그 후가 될 수 있다는 건 미지수.    

아니, 이번에야말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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