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만 셋

엄마의 초상화

by Baumee

엄마는 스물셋 어린 나이에 세 살 많았던 총각 우리 아빠에게 시집오셨다. 선으로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밝고 부지런하셨던 엄마는 시집오셔서 동네 어른들께 금방 인정받으시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2남 1녀의 장녀로 태어나 자라신 엄마는 솔선수범하고 추진력 있는 살림 솜씨에 아빠가 무척 반하셨다고 한다. 홀어머니 밑의 2남 2녀의 장남이셨던 아빠에게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밝고 부지런하고 항상 좋은 표정으로 역할을 톡톡히 해내셨던 분이었던 것이다. 음식 솜씨 또한 매우 좋으셔서 우리 집 김치는 맛이 좋기로 유명하였다. 콧노래를 하시며 즐겁게 가족들의 밥상을 차리시고 빨래를 해서 너셨다. 소문난 살림꾼 우리 엄마.



시집오신 후 그 이듬해 겨울, 엄마는 나를 낳으셨다. 첫째 아이 딸이었다. 그 첫째 아이는 가족들의 축복 속에 세상에 나왔고, 맏아들의, 큰 오빠, 큰 형의 첫 딸을 신기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가족들은 맞이하였다. 번갈아 안아보며 그렇게 가족들은 장남의 첫아기를 받아들였다. 엄마는 항상 밝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셨고 아이에 대한 사랑스러운 마음을 숨길 수 없어하셨다. 그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고 사랑을 받았다. 엄마는 생애 첫 아이를 항상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먹이고 입히셨다.



아이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며 마당을 놀이터 삼아 다닐 때 즈음, 어느 여름날 엄마는 둘째 아이를 출산하셨다. 딸이었다. 장남이었던 아빠에게 내심 아들을 기대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던 것일까? 축하와 축복, 그러나 아쉽고 서운한 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몸이 튼튼하고 단단한 아들과 같은 딸이었기에 가족들은 기뻐했다. 이때부터였을까? 엄마는 맏며느리로서 아들 출산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하셨던 것 같다. 둘째 딸도 기쁨이었고 사랑 속에 자랐다. 할머니와 아빠, 삼촌, 고모들은 아들에 대해 그렇게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맏아들의 아내로서 엄마는 부담을 느끼지 않으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엄마는 입덧이 심하셨다. 다시는 아이를 갖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그 두 딸은 예쁘게 자라 가족과 동네 어른들의 사랑과 기대를 듬뿍 받았다. 엄마를 닮아 어디다 견주어도 바꿀 수 없는 예쁘고 영명한 딸들이었다. 아이들은 곧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엄마는 학부형이 된 것에 매우 신이나 하셨다. 아이들이 글자를 배우고 산수를 하는 것 하나하나 자랑이었고 보람이었다. 무엇보다도 건강하게 자라 주는 아이들이 기특하고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그 아이들을 위해 엄마는 무슨 희생이든 기꺼이 감수하셨고 삼시 세끼를 빠짐없이 해서 꼬박꼬박 먹이셨다.


그 사이 도련님이었던 삼촌이 결혼을 하셨다. 삼십 세를 훌쩍 넘긴 늦은 결혼이었다. 그 삼촌은 작은 아빠가 되었고 곧 아이를 갖게 되었다. 첫째 딸을 낳더니 몇 년 후 우리 집에서 그 귀하디 귀한 아들을 낳았다. 집안의 대 경사였다. 할머니는 너무 기뻐하셨다. 이제 대를 잇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그런데 그때부터 엄마는 아들 낳은 둘째 며느리를 대하는 할머니의 다른 태도를 견디셔야만 했다. 모른척해도 서운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분가한 작은 아빠는 자주 아이들을 데리고 큰집에 오셨는데 우리는 사촌들과 재미있게 노느라 몰랐지만 뒤에서 엄마가 견뎌야 했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엄마는 그러나 내가 못한 일을 자네가 해냈다고 잘했다고 작은 엄마를 아껴주셨고 사촌 동생들을 언제나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사랑해주셨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무렵 엄마는 배가 불러오셨다. 뜻하지 않은 임신이었다. 그때 입덧으로 고생하시며 엄마는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되어 부끄럽다며 임신하신 배를 항상 가리고 다니시기 바쁘셨다. 집안 사업이었던 슈퍼마켓 운영을 하시며 집안 살림을 하시며 항상 분주하셨지만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으셨던 엄마다. 사업이 잘 되고 있었고 우리 집이 번창하던 때였다. 가족들은 이제 정말 아들을 보려나 표현을 안 해도 기대가 무척 컸다. 나는 불러오는 엄마의 배가 신기했다. 그러던 어느 봄날 내가 학교에서 막 돌아왔을 무렵 몸을 풀어 방에 누워 계셨다. 동네 분들의 축하가 이어졌고 다니는 교회에서 오셔서 예배를 드리고 가셨다. 딸이었다. 그 견디기 어려운 입덧을 견디며 출산한 아이가 또 딸. 우리 집은 셋째로 경사였으나 어렵게 가진 아이가 다시 딸이어서 그 아쉬운 마음이 이만저만이 아닌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기쁘고 감사했다. 엄마도 뱃속의 아이가 아들이었으면 바라셨으나 이렇게 온 셋째 딸도 소중하고 귀했다. 이렇게 엄마는 세 딸의 엄마가 되셨다.



엄마는 우리 딸들을 데리고 목욕탕을 가시는 것을 매우 즐거워하셨다. 딸들의 보송보송하고 흰 살결을 바라보고 밀어주는 것이 뿌듯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셋째가 생기고부턴 엄마는 세 딸을 데리고 목욕탕에 갈 때면 여간 부끄러워하시는 게 아니었다. 줄줄이 셋을 뒤에 데리고 동네 어른들이 계신 공중목욕탕에 가려니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되셨던가 보다. 우리는 그런 엄마의 속도 모르고 태평하게 온탕 속에서 장난을 치며 목욕을 즐겼다.


그 세 딸들은 엄마의 극진한 희생과 사랑 속에 동네에서는 예의 바르고 영민한 아이들로, 학교에서는 다방면에서 재능이 있는 우등생들로 자라났다. 흰 살결에 둥근 얼굴을 가지고 있었던 우리, 엄마 딸들은 동네 아주머니들의 시샘 거리가 되기에 충분하였고 각종 상을 휩쓸어 올 때마다 어쩜 그렇게 딸들을 예쁘게 낳았냐고 아우성이 대단하였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셨다.



지금은 딸 아들 구분 없이 하나 낳아 잘 기르자거나 낳지 않는 추세도 강한 트렌드가 있는 때지만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고 아들을 갖는 것이 시집간 며느리로서는 당연한 의무였던 그 당시, 손 귀한 홀시어머니 아래 장남에게 시집오셔서 누가 뭐래는 사람이 없어도 마음고생을 다분히 하셨던 우리 엄마. 그러나 우리 딸들에게 힘든 내색, 얼굴 한번 찡그리신 적이 한 번 없으셨다. ‘딸들아, 우리 딸들아, 사랑하는 우리 딸들아’ 하며 언제나 우리의 용기와 기를 북돋으셨던 엄마. 그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언제나 우리 세 자매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엄마의 고상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는 메아리가 되어 우리 자매에게 언제나 돌아왔고 그 사랑 속에서 우리는 어여쁘게 자라고 있었다. 엄마,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