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원래 있던 낡은 집을 헐고 그 자리에 큰 건물을 지어 일층은 마트와 아빠의 공업사를 위한 공간으로, 이층은 우리 가족이 사는 집으로 지었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 사업인 슈퍼가 시작되었는데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이었으니까 그때는 지금의 마트가 아니라 슈퍼라고 했다. 동네의 구멍가게보다 조금 크고 더 업그레이드 된 규모가 넓직하고 쾌적한 공간의 마트였다. 지금의 편의점 규모정도라고 할까? 그 때는 구멍가게를 탈피한 슈퍼의 존재가 동네의 사람들에게는 새롭고 와보고 싶은 공간이 되었었다. 엄마와 아빠는 부지런히 공사를 하고 집을 올려 지어 드디어 살기 좋은 현대식 건물을 갖게 된 것이었다. 새로 시작된 슈퍼 이름은 아빠와 작은 아빠가 동네에서 다 아는 형제였기 때문에 의좋은 형제의 집이라고 해서 ‘형제 슈퍼’라고 지었다. 이 형제 슈퍼에서 할머니를 포함한 가족들의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아침에 슈퍼를 열면 우리 가족은 윗층 집에서 내려와 가게를 봤다. 할머니, 엄마, 아빠, 때때로 학교를 마치고 온 나와 동생까지. 엄마는 위 아래층을 부지런히 오가며 살림과 가게일을 돌보셨다. 물건을 도매차에서 받아 계산을 치른 뒤 상품을 진열하고 그 상품들 위에 가지런히 가격표를 인쇄해 붙이고 먼지가 쌓이지 않게 수시로 흰 면장갑을 낀 손으로 ‘탁 탁’ 경쾌하게 물건을 터셨다. 각종 과일, 채소로부터 시작해서 각종 식료품, 분유, 기저귀 등 유아 용품, 각종 과자류, 아이스크림 등이 보물처럼 집에 쌓여갔다. 가게의 한쪽 잘 보이는 곳 윗쪽에는 TV가 한 대 놓여있었고 머지않아 동네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우리 집 가게는 동네 어른들, 동네 아저씨, 아줌마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사교성이 좋으셨던 할머니의 친구들로부터 시작해서 엄마의 지인들, 아빠의 오랜 친구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반찬 거리를 사러, 저녁 밥 거리를 마련하러, 저녁에 퇴근 하면서, 때로는 그냥 우리 식구들을 보러... 그러는 사이 많은 단골들이 생겼고 우리 가게는 호황을 이루었다.
본래 밝으시고 측은지심이 있으셨던 엄마는 가게 앞을 지나가는 꼬마들이 있으면 사탕 한 개라도 쥐어주려고
하셨다. 남의 자식이라고 해서 그냥 무관심하거나 나몰라라 하지 않았던 엄마는 밖에 넘어지는 아이가 있으면 가서 손수 일으켜 주시고, 가게 안에 들어오는 꼬마 손님들을 한번 씩 쓰다듬어 주시며 예쁘다 예쁘다 하셨다. 뿐만 아니라 폐지를 줍는 걸인이나 행색이 남루한 할머니들이 있으면 가게 안으로 들여 빵과 우유를 건넸다. 오시는 손님들에게 진심으로 우러나는 마음으로 대해드리니 많은 사람들이 엄마를 따르고 좋아했다. 그러다보니 우리 가게로 속상하고 어려운 일을 하소연하러 오는 아주머니들도 적지 않았다. “남편이 ....., 우리 애가 .....” 하고 말이다. 항상 밝은 얼굴로 손에 면장갑을 끼시고 가게 안팎을 다니며 물건을 정리하고 주변을 돌보는 엄마의 모습에 사람들은 활기있는 에너지를 느꼈고 그것을 받아갔다.
장사가 항상 잘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쌓여가는 재고가 있으면 한숨을 쉬시기도 하셨는데 그런 재고를 만들지 않으려고 물건을 들려올 때면 신중에 신중을 가했다. 물건을 팔려고 하는 도매상인들과 받지 않으려고 하는 엄마의 실랑이가 한참 이어지기도 했다. 때론 옆에서 보다못한 할머니가 “그냥 받아. 그냥 받아.” 하셔서 물건을 억지로 들여오면 엄마는 “재고로 남으면 어떻해요. 지혜 아빠도 뭐라고 할 거고” 한숨을 쉬신다. “내가 말해줄게. 걱정 마. 잘 팔리겠지.” 나는 멀리서 엄마의 새로 들여온 물건을 정리하시는 모습을 보며 내가 미안해졌다.
가게는 양 옆으로 출입문이 나있고 그 중앙에 카운터가 있었다. 카운터에는 넓은 철 마루가 있었는데 아빠는 그곳에 연탄을 이용해 온돌처럼 불이 들어오게 해 가게를 보시는 할머니와 엄마를 따뜻하게 해드렸다. 그곳은 그야말로 우리의 보금자리와도 같았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윗 층 집에는 다 가게에 내려가 보고 계셨으므로 아무도 없었고 썰렁했다. 우리는 숙제나 책을 가지고 가게로 내려와 그 철 마루에 앉거나 배를 깔고 숙제를 하고 책을 읽곤 했는데 보일러 공사가 잘 안되 차가웠던 윗 층 방바닥보다 여기가 훨씬 따뜻하고 안온했다. 할머니와 엄마는 철 마루에 앉아 그 온기에 기대 손을 엉덩이 밑에 밀어 넣어 따뜻하게 하셨고 손님을 맞고 계산을 하셨다. 그리고 가끔 앉아 꾸벅꾸벅 졸기도 하셨다. 넓은 슈퍼 가운데 있는 우리 식구들의 아지트였던 것이다. 그 철 마루가 있었던 곳 벽에는 하얀 인터폰이 있었다. 그 인터폰으로 위 아래층이 소통을 하였는데 “지혜야, 동생 데리고 밥 먹으러 올라와.” 하고 식사 준비를 끝낸 엄마는 자주 인터폰을 울리셨다. 그 철 마루는 지나가다 가게를 들른 동네 지인들의 익숙한 쉼터이기도 했다. 엄마는 친한 손님이 추위에 떨며 손을 ‘후, 후’ 불면서 가게 안을 들어오시면 “이리 와서 앉았다 가세요. 추우시죠?” 하고 자리를 권하고 무릎을 덮어드렸다. 그럼 손님들은 그 철 마루에 걸터앉아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한참동안 이야기를 하고 갔다.
막내 동생을 임신하셨던 엄마에게 그 철 마루는 매우 소중했다. 그 자리에 앉아 온기를 머금고 손님이 없을 때면 책을 읽으셨다. 큰 자켓으로 배를 가린 채. 사람들이 오면 엄마는 겉옷으로 배를 최대한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셨다. 엄마는 큰 딸이 초등학교 고학년 되었을 무렵 뜻하지 않게 찾아온 늦은 임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우셨나 보다. “엄마, 왜 배를 가리고 있어?” 하고 물으면, “남부끄럽다 야. 이 나이에 무슨 임신을 해가지고. 어유 참” 하셨다.
그 철 마루에 앉아 우리 가족은 쉬기도 하고 담소를 나누며 손님이 올 때면 손님을 맞았고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 철 마루는 가게가 문 닫기 한 시간 전 무렵 하루 종일 보내던 온기를 비로소 꺼뜨렸다.
형제슈퍼가 문을 연지 얼마 후 우리 집 길 건너에 또 다른 슈퍼가 생겼다. ‘맛나슈퍼’. 엄마의 교회 친구 분 가정이 연 새로운 슈퍼였다. 우리 가게는 경쟁 상대가 생긴 것이다. 나는 ‘왜 하필이면 우리 집 앞에 슈퍼를 세웠을까?’ 엄마의 친구 분이 원망스러웠다. 거기에 이름까지 좋아보였다. 엄마와 아빠는 그 가게의 개업식에 참석해 축하해주었고 웃는 얼굴로 돌아오셨다. 엄마는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잠시 어두운 기색이 엄마의 얼굴을 지나가는 듯 했다. 그 분은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처녀 적 엄마의 살던 동네와 가까이 살았던 그 친구는 우연치 않게 엄마가 시집을 온 같은 동네에 시집을 오고 같은 교회에 다녀 서로 매우 좋아하였다. 더구나 엄마와 나는 그 친구의 집에 손을 잡고 몇 번이나 놀러가곤 했었다. 언제나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시던 인상 좋던 그분이 조금 미웠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러한 불편함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친구 가정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해주기로 마음을 먹으신 듯 엄마는 친구를 반기는 마음으로 맞았다. 그리고 친구에게 좋은 음식이 있으면 ‘가까워서 좋네’ 하며 나를 시켜 갖다주기도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이것은 엄마가 신앙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이후 엄마는 그 친구와 만나 서로의 가게 상황을 공유하며 어렵고 힘들 일을 나눴다. 그리고 함께 가길 원하셨다.
이렇게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선 ‘형제슈퍼’와 ‘맛나슈퍼’는 길 가던 손님들을 ‘어디로 가야할까?’ 고민하게 만들었지만 서로 사이좋게 선의의 경쟁을 하며 공존했다.
지금은 가족 이사로 남의 건물이 되어버린 '형제수퍼'.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의 가장 행복했던 행복 바이러스가 그곳에 가면 엄마의 온기와 함께 아직도 남아있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