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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Jul 17. 2023

나를 외치다

엄마, 그 노래 불러줘.

  역전세를 겪고 세입자에게 집을 넘기고 시세 차액까지 내준 빈털터리가 되어 집에 들어온 날 저녁, 중학생이 된 아이는 엄마가 부르는 노래가 듣고 싶다고 했다.


새벽이 오는 소리/눈을 비비고 일어나/곁에 잠든 너의 얼굴 보면서/힘을 내야지/절대 쓰러질 순 없어/그런 마음으로/하루를 시작하는데/(...) 절대로 약해지면 안 된다는 말 대신/뒤처지면 안 된다는 말 대신/지금 이 순간/끝이 아니라/나의 길을 가고 있다고/외치면 돼/


  바로 마야의 <나를 외치다>였다. 평소 우리 식구는 크고 작은 축하할 일이 생기면 모아 두었다가 주말 저녁에 집 근처에 있는 흑돼지 구이집으로 가고는 했는데 이미 유명한 맛집이라 매번 대기를 올려놓고 근처에 있는 동전 노래방에서 3~40분씩 노래를 부르며 기다리고는 했다. 마야의 <나를 외치다>는 그때 내가 불렀던 노래인데 아이에게 참 인상 깊게 들렸나 보다. 하긴 나도 아주 오래전에 나온 노래이지만 TV 화면에 나오는 가요 프로그램 속 마야의 모습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고 요즘도 가끔 꺼내 듣고는 한다. 중학생 아이는 학교에서 배운 행진곡이 멋있다며 즐겨 듣더니 아마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내 영혼까지 탈탈 털린 날인데?'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이 앞에서는 굳이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생각이 바뀌었다.

‘지난 간 일이고, 앞으로는 좋을 건데 굳이 걱정시킬 필요 있어?’

앞으로는 좋을 거라니! 그렇게 털리고도 긍정을 유지하는 나에게 나도 두 손을 들었다.


“우리 고기 먹으러 갈까?”


현관문을 나섰다. 손에 손을 잡고 걷는데 이상하게 발걸음이 가볍다. 사실 모든 서류 정리를 끝내고 집으로 오는 길에서야 아침에 아이의 옷을 입고 나간 것을 알아차릴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 하루였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기쁨이 더 큰 것인지 이제 내 인생에는 ‘좋아질 일’만 남았을 거라는 희망이 앞섰는지 지금으로서는 모를 일이다. 어쨌든 코끝에 봄기운이라도 닿으니 마음마저 춥진 않았다.


  오늘은 붐비는 저녁 시간에 왔더니 흑돼지 구이집도 바빴다. 대기표를 받고 보니 1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래도 괜찮다. 평소처럼 동전 노래방에 가면 되니까 말이다. 오늘의 첫 곡은 아이가 듣고 싶다는 <나를 외치다>를 불렀더. 아니 외쳤다. 첫 소절부터 감정이 울컥했지만 눈물을 참았다. 아이들 앞에서 눈물을 참아낸 내가 기특할 지경이다.


  순간이다. 삶은 많은 순간들이 알알이 모여 채워져 있다. 힘든 것도 순간이고, 기쁜 것도 순간이다. 지금처럼 순간만 견디면 지나가는 것이 인생이다. 노래를 부르다 보니 첫 소절에서 잘 참았던 눈물이 또 왈칵 쏟아질 뻔했다. 이번에도 이 순간 버티면 된다. 곧 지나간다. 이를 꽉 물고 순간을 참으니 눈물이 나질 않았다.

  아이 앞에서 씩씩하고 밝은 모습을 보여준 순간의 선택에 지금이라도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다. 실패한 인생도 아닌데 마치 전부를 잃은 양 울 필요는 없으니까. 만약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아니? 빈털터리가 되어서 우리가 지하 100층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날이었어! 그런데 지금 그런 노래를 부르게 생겼어?’라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면, 첫째, 그렇다고 해서 내 감정이 나아졌을 리도 없었다. 둘째,  폭발하는 엄마의 모습에 아이도 상처를 받고, 돈에 대한 그릇된 가치관을 가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집착하거나 경멸하거나.


  지난 일에 대한 감정만 참은 게 아니라 아이에게는 여전히 안전한 휴식처가 되고 싶은 마음을 지킨 것이다. 괜찮지 않지만 그래도 혼자만의 상처로 끝나서 참 다행이다, 싶은 순간이었다.

  그날 밤, 나의 심장은 언제나 나와 함께 걷겠다고 ‘지금 이 순간/끝이 아니라/나의 길을 가고 있다고’ 마이크에 대고 스피커가 터져라 외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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