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를 다녀왔습니다.
물론 지금 살고 있는 제주가 휴가라는 단어 속의 쉼과 재충전의 의미를 가장 잘 담고 있는 땅이긴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작년, 재작년의 휴가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 휴가의 기억이 잘 떠오르진 않네요. 아, 곰곰이 더 생각해 보니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넘어간 것이 휴가였어요. 호캉스를 떠났습니다. 바닷물 대신 호텔 수영장에서 놀기도 하고, 서귀포 해변을 걷기도 했어요. 올해는 충청북도를 찍고 경기도, 충청남도, 경상북도, 대구까지 발자국을 남기고 제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관광지를 찾아다닌 것은 아니지만 평범한 생활 속에서 고요한 평화와 작은 행복의 조각을 꿰어 왔다는 것을 일상이 시작된 첫날 알게 되었어요.
세월이 빨리 변한다지만 변하지 않아 안심이 되는 휴가의 추억을 찾았습니다.
용인 에버랜드에서 보낸 휴가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도대체 얼마 만에 온 거지?'
한참을 생각해 보았는데, 마지막 기억이 약 십 년 전이였어요. 지금 열 살인 둘째 아이 출산을 위해 산전휴 휴가를 쓰고는 출산 예정일 2주 전에 첫째 아이와 함께 갔더라고요. 한겨울에 짐가방을 가득 챙겨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서 친구를 만나 폐장까지 놀다가 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갑자기 출산하는 일이 생기지 않아 참 다행이었네요.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에버랜드는 똑같아 보였어요. 사파리월드와 로스트밸리의 코스도, 직원들의 멘트도 그대로인 것 같았어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곳 어딘가에는 제가 남긴 추억이 그대로 잘 간직되고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어 고마운 장소였습니다. 아, 그때는 임신부라 타지 못했던 아마존 익스프레스를 이번에는 두 번 타고 온, 다른 점도 있긴 하네요.
반면에 10년이 지나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실감을 한 도시는 대구였습니다.
대구는 자주 다녔지만 친구의 집을 오가고 국도로 친정을 오갈 때 다니던 국우터널이 있는 길을 연결하는 새로운 고속도로가 있더라고요. 고속도로를 빠져나오니 바로 큰 대학 병원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길이구나, 하고 생각을 하면서도 무언가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정말 도시의 발전 속도는 빠른 것 같아요. 제주로 이사를 온 뒤 두 달 만에 대구를 갔을 때도 매일 보던 건물이 바뀌어서 무척 낯선 느낌이 들었던 적이 있는데 오랜만에 또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가 아는 것과 경험한 것이 결국 영원한 진리는 아닌 것처럼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경험한 것만 맞다고 우겼다가 나중에 새로 난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쩔 뻔했어요. 사실을 말하는 게 사실은 제일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내 입이 즐겁기보다 상대방의 입이 즐겁도록 경청하고 수용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휴가에서 찾은 두 팔 벌려 축하할 기쁜 일은 엄마의 선전포고입니다.
"나는 또 여행 간데이!"
지난 4월에 친구들과 유럽 여행을 다녀오시더니 지금부터 준비해서 겨울이나 내년 봄쯤에 또 여행을 떠날 계획이니 그런 줄 알아라고 아주 큰 소리를 발표를 하셨지요. 목적지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두바이와 스페인 '순례자의 길' 두 곳이 끌린다고 합니다. 제가 본 엄마는 다른 가족을 위해 늘 배경이 되어 주셨습니다. 끼니를 챙기고 집안을 돌보는 것부터 삼 남매에게 필요한 것이 있나 살피고 챙기는 것도, 가끔 부르르 끓는 냄비처럼 욱하는 젊은 날의 아빠를 이해하는 것도 모두 엄마의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자리는 짐이 많고요. 그런 엄마가 뒤늦게라도 엄마의 마음이 바라는 것을 찾은 것 같아요. 엄마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며 살았지만 한편으로는 엄마의 희생이 안타까웠는데 마음이 뻥 뚫립니다. 저도 열심히 살아서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물론 엄마가 원하면 말이죠.
하지만 걱정도 하나 생겼습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점심으로 삼계탕을 드셨다는 아빠는 늦은 밤이 되도록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안색도 좋지 않아 보였고요. 늘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이번에도 자고 일어나면 다 낫는다는 한 마디를 하고는 일찍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그리고 목이 말라 잠에서 깬 아빠는 부엌으로 가시다가 잠시 중심을 잃으셨습니다. 금방 괜찮아지셨지만 이런 일이 처음이라 온 식구들이 놀랐지요. 엄마도, 아빠도 자다 깨서 그렇다고 입을 모아 말씀하셨지만 그 모습은 사실이라기보다 오랜만에 만난 딸에게 걱정을 안겨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사실은 두 분도 무척 놀랐다는 것을 말이죠.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돌아오는 내내 초조했어요. 부모님은 늘 자리에 계실 거라는 착각과 부모님의 시간만은 느리게 흐르길 바라는 말도 안 되는 희망사항이 제 무의식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또 만나는 날까지 두 분이 입을 모아 하신 말씀처럼, 평범한 일상이길 빕니다.
휴가에서 좋은 일과 걱정이 함께 생기니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어요.
태풍으로 비행기가 줄줄이 결항과 지연이 되는 바람에 먼저 육지로 떠난 큰 아이를 하루 이틀 늦게 볼 뻔했지만 제가 탈 비행기는 제시간에 맞춰 순조롭게 출발한 것부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했습니다. 첫 목적지인 청주에 태풍이 지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비가 적게 내린 것, 흐린 날씨 덕분에 아이들과 함께 에버랜드를 탐험하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는 것, 엄마의 따뜻한 집밥이 여전히 힘을 주는 마법의 보약이라는 것, 창 밖의 보이는 풍경을 예쁜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것 등. 주어진 것의 소중함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기로 했어요.
휴가를 다녀왔으니 이제 진짜 하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휴가 때 첫 돌이 지난 조카를 6개월 만에 만났어요. 아직 말을 잘 못하지만 6개월 전에 비해 의사 표현이 아주 명확해졌어요. 손짓, 몸짓 그리고 '응!'이라는 짧은 단어로 자신의 존재를 마음껏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반짝반짝 작은 별, 노래를 불러주면 맞춰 춤을 춰 주기도 하고, 코를 찡긋하며 웃기도 했어요. 정말 쑥쑥 자랐더라고요. 하반기와 한 해를 갈무리하는 시점에 저도 조카처럼 쑥쑥 자라 있도록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하며 하루를 소중히 채우고 싶습니다. 조카처럼 미소를 나누는 일도 잊지 않고요.
브런치 스토리의 작가님과 독자님들의 하반기도 자기 다운 속도로 순조롭게 흘러가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