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처럼>, 다니엘 페낙
좋은 술과 달리, 좋은 책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좋은 책들이 책장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동안 나이를 먹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그 책들을 읽어도 좋을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고 여겨질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새로이 시도를 한다.
6년 6개월 전에 읽었던 책을 지난 주말에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언젠가 읽겠지'하는 마음에 책을 사고 책장에 꽂아두던 '책 수집가' 시절, 불편한 양심에 큰 위로가 되었던 위의 문장을 다시 만났고 새로운 문장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사람을 만나며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혼자 책을 읽는 시간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오전의 1시간 남짓, 늦은 밤의 2시간 정도이지만 이렇게 지켜낸 독서 시간은 무리에 섞이지 않아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좋은 친구가 되어 줍니다.
독서에 관한 이야기나 글을 통해 가끔 <소설처럼>을 소개한 적이 있기에 제가 이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독자님들도 계실 것 같아요. 6년 6개월 만에 다시 읽어보았는데 좋은 책은 언제나 좋은 그대로입니다. 교사였던 다니엘 페나크 작가의 유쾌한 문체와 독서에 관한 독특한 생각이 여전히 참 좋았습니다. 제가 처음 이 책을 읽은 계기는 아이들의 교육-책 육아-에 참고하기 위해서였어요. 이제야(아니 방금) 알게 되었지만 6년 전,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펼친 <소설처럼>에서 교육이 아니라 읽어야 할 책이 자꾸 쌓이는 제 자신을 위한 해답에 감동을 받았네요. 좋은 책이 주는 감동도 나이를 먹지 않는지 오랫동안 그대로 남아있고요.
책을 읽으며 발견한 감동은 더 오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도 떠오르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중 하나는 아이가 처음으로 제 손으로 직접 단어를 쓰고, 더듬더듬 읊어본 그 순간도 있지요.
"엄-마."
환희의 외침이야말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지적 항해의 결실이요, 달 표면에 내디딘 첫 발자국만큼이나 거대한 도약이다. 아무렇게나 그어지는 한 획 한 획이 모여 무한한 감정을 담고 있는 하나의 의미로 바뀐 것이다.
"춘기야, 혹시 네가 처음으로 쓴 단어가 생각나니?"
"글쎄, '엄마' 아니면 '사랑해'가 아닐까?"
10년이 훨씬 더 지났기에 둘이 함께 머리를 맞대보았지만 기억은 가물가물합니다. 제 기억에도 아마 '엄마'일 것 같습니다. 뜬금없이 '사자'나 '나비'라고 쓰진 않았을 거예요. 그럼요. '엄마'였을 것 같아요. 그 환희의 순간을 평생 이어가고 싶거든요. 어쨌든 아이가 처음으로 한 획 한 획을 그으며 한글을 쓰는 민족으로 거듭나던 그 순간의 긴장과 떨림, 설렘은 이루 말할 수 없죠. 아이가 쓴 것은 글자(혹은 선)이었지만 엄마이기에 그 글자(혹은 선)에 더 많은 의미를 붙이고 담았어요.
감동은 더 열심히 -마치 동화 구연가가 되어 연기를 하듯- 책을 읽어주고, 가르쳐주(고 싶은 낱말이 있다면 한 음절씩 또박또박 손가락으로 짚어가면 읽어주)는 동기를 불러일으킵니다. 돌이켜보니 그 무렵이 엄마인 저에게는 '소리 내어 읽을 권리'를 가장 많이 행사한 시기이며, 아이에게도 역시 책이 주는 무상의 혜택을 누리며 시공을 초월하는 상상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만나는 때였습니다.
다행히 저희 집에서는(진실을 말하자면 춘기에게는) 이 시기가 대여섯 해 동안 이어졌습니다. 춘기에게는 네 살 터울의 동생이 있는데, 동생이 여덟 살 때까지는 9시가 되면 '빨리 잘 준비해라'는 재촉하는 엄마가 퇴근을 하고 곧 동화 구연가가 된 엄마가 출근을 하셨기 때문이지요. 춘기는 운이 좋았달까요?
난 여덟 살까지가 좋았어!
아홉 살이 되니 엄마가 이제 혼자 책을 읽으라고 했거든!
지난여름, 이렇게 말하며 이불에 얼굴을 파묻던 춘기의 동생인 겨울이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순간 다니엘 작가의 목소리도 환청처럼 들려오고요.
누군가가 읽어주는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이란 나이와 상관이 없다.
아, 의도하지 않았지만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는 괴로움에 얼굴을 파묻어야 할 사람은 바로 저였어요. 겨울이가 얼마나 속상했을지! 어른이 되어서 배운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모임은 그림책 읽기였습니다. 5년 전에는 영어 원서로 그림책 읽기를, 재작년에는 그림책으로 만나는 심리학을 배웠어요. 나를 알아가고, 이해해 가는 과정도 좋았지만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제가 했던 말이 아니라 선생님께서 읽어주는 그림책을 조용히 듣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읽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 읽어주는 그림책에 귀를 기울여 듣는 사람이 된 순간이 즐거운 행복이었지요.
아, 그 느낌을 알면서 이제는 혼자 읽으라고 선포했다니! 제가 너무 심했네요.
그런데 저녁이 되면 우리가 얼마나 바빠요. 퇴근을 하고 8시가 되면 저녁을 먹고, 저녁을 먹느라 의자에 앉았더니 엉덩이는 또 얼마나 무거운지 설거지를 하려고 일어나는 것도 큰 결심이 필요한 계절이 되었어요(아마도 추워서 몸이 무거워졌을 거라며 계절 탓을 해봅니다).
책 읽는 시간은 언제나 훔친 시간이다(글을 쓰는 시간이나 연애하는 시간처럼 말이다).
대체 어디에서 훔쳐낸단 말인가?
굳이 말하자면,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의무의 시간들에서이다.
독서란 효율적인 시간 운용이라는 사회적 차원과는 거리가 멀다.
문제는 내가 책 읽을 시간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그렇다고 아무도 시간을 가져다주지는 않을진대), 독서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빼박(빼도 박도 못하다)'입니다. 설거지할 시간을 훔치고, 음악을 들으며 감상에 젖을 시간을 훔쳐 오늘 밤에는 노란빛 스탠드 조명을 켜고 침대헤드에 기대어 앉아 춘기와 열 살이 된 겨울이에게 책을 읽어줘야겠어요.
아이가 가장 좋아하던 책을 골라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크게 소리 내어 읽는 것.
그냥 책으로, 책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