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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Jun 26. 2023

넌 무엇을 기대했나?

<스토너 STONER>, 존 윌리엄스

  어제와 오늘의 날씨는 한 계절을 뛰어넘은 느낌입니다. 어제는 누구나 장마가 시작되었구나, 생각하며 축축해진 공기를 들이마셨지만 오늘 아침부터는 갑자기 비가 그치고 길은 바싹 말랐지요. 지난밤만 해도 어떤가요. 더워서인지 방 안을 돌아다니는 작은 모기 탓인지 서너 번은 족히 깬 것 같은데, 아침에 창문을 여니 선선한 바람이 집 안의 습기를 밖으로 밀어내 줍니다. 어제는 한여름이고 오늘은 가을의 시작 같습니다.
 

스토너 @무지개인간

 

  어젯밤 자기 전까지 존 윌리엄스의 장편 소설인 <스토너 STONER>(알에치코리아 출판)를 모두 읽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소설을 읽을 때는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이야기에 빠져 스스로 만든 책 속 세계는 허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짓고 세워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와르르 무너뜨려야 하는 게 허무할 때가 있습니다. 게다가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현실 세계와 오가며 시차 적응을 하느라 멍하게 앉아 생각에 잠겨있는 저를 보게 되더라고요. 그래도 소설은 참 매력적입니다. 한 번 쥐면 내려놓고 싶지 않은 매력이 있지요.


  <스토너>는 책 뒤표지의 추천사처럼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문체'로 쓰인 소설입니다. 인상 깊은 표현들이 많아 책을 다시 읽을 때 방해가 되지 않게 회색 펜으로 밑줄을 그었습니다. 방해가 되지 않길 바라지만 밑줄은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몇 문장 정도만 골라 옮겨 적어 봅니다.

  (발췌한 페이지는 따로 적지 않았으니 이 책을 읽으며 독자님의 빛나는 문장과 함께, 제가 고른 문장도 보물 찾기처럼 만나길 바랍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젊은 나이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부모는 항상 늙은 사람이었다.
햇빛이 빰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그가 그곳의 스탠드를 끄자 책상이 회색으로 변하면서 생기를 잃었다.
전쟁이 벌어진 몇 해 동안은 시간이 흐릿한 게 한데 뭉쳐서 흘러갔다.


  1891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윌리엄 스토너가 농업을 공부하기 위해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가 문학과 '사랑에 빠져' 영문학도가 되고 교수로 살다 세상을 떠나는 스토너의 일생을 그린 소설입니다. 제가 고른 문장이 주는 느낌처럼 밝고 경쾌한 소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슬프고 고독하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특별하지 않는 스토너의 삶이 저와(우리와) 어느 한 부분은 닮았고, 책의 첫 부분에 나오는 '스토너의 이름은...(중략)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라는 문장을 통해 죽음은 이름을 남겼다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책을 읽은 독자는 삶을 돌아보며 더 잘 살기 위한 중간 점검을 하게 되죠.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아주 많아지는 책입니다.


  그래서 수수한 삶을 살았던 스토너는 행복할까? 제가 아주 단순한 방법으로 책 속 주인공을 받아들이는 질문이지요. '행복하냐, 그럼 되었다. 나도 행복하다.' 이런 느낌이지요.

  저는 행복했을 것 같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 스토너는 '세상의 모든 시간이 그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이 쓴 빨간색 표지의 책을 꺼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책장을 펄럭펄럭 넘기며' 마지막 살아있는 순간을 보냈으니 말입니다. 또 그의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은 그의 몸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지요. 어쨌든 그가 좋아하는 책과 마지막을 함께 했습니다. (그러다가 책이 빠르게 떨어지며 방의 침묵을 깼지만 스토너를 위해 책이 그를 다정하게 덮어두었다고 기억하고 싶네요.)


  1965년 처음 출간 되었을 때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2006년 '뉴욕 리뷰 오브 북스'판으로 다시 출간되면서 역주행 베스트셀러 신화를 쓴 <스토너>. 역주행 발자취를 따라가듯 저도 제 삶을 비디오를 되감듯 돌려 보았습니다. 그리고 26살의 저를 만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게 되었지요. 그때는 외국계 증권사의 컴플라이언스 팀장이었습니다. 직책과 책임감은 물론이고 어린 나이에 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팀원들과 호흡을 맞추는 일은 쉽지 않았지요.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불편한 감정을 자주 누르며 회사를 다녔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나이의 스토너는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데 당당했습니다. 그런 스토너가 부러웠는지 저에게는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으로 남아있지요.


그는 금요일에 매스터스와 핀치를 만나 자신은 독일군과 싸우러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젊은이라면 전쟁에 나가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대, 그는 "자네는 확실히 마르고 굶주린 사람처럼 보여."라는 친구의 짓궂은 말에도 자신의 소신을 지켜냈습니다. 26살의 저도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만 생각하며 조금 더 성숙하게 삶을 그대로 그렸다면 지금쯤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떠올려보았지요.

  하지만 앞으로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삶은 계속 흐르고, 주어진 시간을 씨실과 날실로 엮듯 인생의 문양을 잘 만드는 것이 지금 제가 해내야 할 일임을 잘 알고 있어요.


  스토너는 삶의 끝자락에서 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아니 우리에게 던집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스토너 @무지개인간


  보이시나요?

  '넌 무엇을 기대했나?'

  시간의 재촉을 무시하고 오래 두고 생각해 볼 숙제를 받았습니다. 장마철에도 잘 어울리는 책이니 꼭 읽어 보시길 추천해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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